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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기독교 성지순례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수촌교회 일본경찰이 3.1운동 주동 예배당을 불태우다

워크뷰 2015. 2. 11. 06:00


 화성 기독교 성지순례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수촌교회 일본경찰이 3.1운동 주동 예배당을 불태우다


수촌교회 

화성 제암리교회에 이어 수촌교회를 찾았다.

이곳 수촌교회는 제암리학살사건보다 먼저 수촌리마을 학살방화사건이 일어났고,

일본경찰은 수촌교회를 불로 태워버린다. 그리고 수촌리가옥 40여채중 36채가 불에 태우는 참사를 겪었으며, 

김의태성도는 불에 타고 있는 수촌교회로 달려가 교회의 중요문서인 교적부(생명록)와 당회록 등이 들어있는 50kg이상 되는 궤짝을 들고 나왔다.

이렇게 귀중하게 건져내어진 유물은 한국기독교 역사에도 기념비적인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현재 복원된 수촌교회에 보관하고 있다.


수촌의 유래

수촌은 예로부터 청룡 백호의 지형을 갖추어 지역이 아늑하고 숲이 무성하며 숲말,

물이 많이 모여 드는곳이라 하여 수촌이라 불렸는데 숲말 또는 수촌으로 불리다가 수촌으로 불리게 되었다.

수촌의 자연적인 마을으로는 

가장동-숲말 동남쪽 가에 있는 마을.

꽃바테-꽃나무가 많은 마을.

용당골-용신당이 있었다 하여 붙은 마을이다.



<사진출처:한국기독교회사>

수촌교회설립과 연혁

1905년 교인 김응태의 주도로 정창하의 집에서 7명이 예배를 본 것을 시작으로,

1907년 초가 15칸을 매입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

1919년 4월 5일 일제의 방화에 의하여 예배당 전소.       

1922년 4월 아펜젤러 선교사등의 도움으로 초가 8칸을 건립하여 예배당으로 사용.

1932년 1월 20일 수촌리로 이전한다.

       독립운동으로 큰 시련을 겪은 수촌교회(교인 다수가 구금, 투옥, 도주, 행방불명 등)는 큰 상처를 입고 쇠퇴하기 시작하여 

       급기야 교회 존폐 위기에 내몰렸으나 뜻있는 분들의 주선으로 1932년 현 교회의 위치인 수촌리로 이전한다. 

       일제 강점기 말기의 극심한 교회 탄압 속에서도 꾸준히 교회를 지켜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1974년 지붕을 양식 기와로 개량하였다가

1987년 원래의 초가형태로 복원하였다.

         규모는 정면 7.33m 측면 4.93m이며, 마루 방 2개 부엌, 현관 용도의 공간으로 이루어져있다.

1986년 5월 20일화성시 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된다.


현재의 벽돌로 지으진 교회는

1965년 6월 15일 미국인의 후원으로 건립되었다.


<사진출처:한구기독교회사>

1938년 1월 11일 수촌교회 교우들의 가장 오래된 기념사진으로 수원지방 대 사경회 기념사진이다.

수촌교회 교우들의 가장 오래된 기념사진으로

앞줄 가운데 한복 입은 분이 이익모 목사(제암교회), 앞줄 오른쪽 첫 번째가 김태권 장로

앞줄 왼쪽 두 번째가 김재학 씨,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김재임 장로 부친 김연묵 권사


수촌교회에서 일어난 비극의 역사

1919년 3.1운동 한 달 뒤인 4월 3일 서울에서 벌어졌던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지게 되었고,

장안면 수촌리와 석포리 사람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평소에 주재소 순경들이 양민들을 학대하고 

무자비하게 대하는데 대한 감정을 항거하기 위하여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향해 몰려갔다. 

그리고 우정면 주곡리 일대의 시위대와 쌍봉산에서 합류하여 집회를 가진 뒤 우정면사무소를 파괴하고 화수리 주재소가 불타버렸다.

이에 일본경찰은 무자비하게 총을쏘아대다가 실탄이 떨어져 도망을 하게되는데,

이 과정에서 가와바다 순사부장과 격투를 벌이던 중 흥분한 군중들이 가와바다를 잡아 내동댕이치며 발로 짓밟아 버렸다.

가와바다는 결국 목숨을 잃었고 일본순경들은 일본 순사부장의 죽음을 보고 독이 오를 대로 올라서 수촌리 일대에 가혹한 보복이 시작되었다.


일본경찰의 4차레 보복

1차 보복 1919년 4월 5일 새벽 3시 반경 일본군 검거반은 천도교 남양교구 순회전교사 백낙열과 수촌교회 감리교 전도사 김교철 등을 체포하기 위해 

          수비대 30여명을 이끌고 수촌리 큰말을 완전히 포위하고 총격을 가하며 천도교 전교실과 수촌리교회당 그리고 

          민가 24채에 불을 질러 5명의 주민들이 부상을 당하고, 14명의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이 옥에 갇힌다.

2차 보복 이날 오후 어은리를 거쳐 발안으로 나오던 수비대가 수촌리에 들러 남은 8채의 가옥을 샅샅이 수색하던 중,

          가와바다 순사부장이 잣밟혀 죽을 때 입었던 그 피 묻은 옷을 찾아내고 주민들을 발안리 주재소로 끌고 가서 혹독하게 고문을 가한다.

3차 보복 1919년 4월 7일 일본수비대는 수촌리 가장말을 비롯하여 꽃말, 용담골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주민 130여 명을 발안리 주재소로 끌고 가 

          밧줄로 묶고 몽둥이질을 하였다. 

4차 보복 1919년 4월 8일 일본수비대는 수촌리로 몰려와 만세시위를 주도한 백낙렬을 찾는데 혈안이 되었으나 주민들의 호응이 없자, 

          나머지 가옥 4채에 다시 불을 질렀다. 이 방화로 수촌리는 전체 40여 가옥 중 36채가 불타는 참사를 겪게 되었다.



앞으로 우리의 자세

수촌교회와 자동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제암리교회가 있는 경기도 화성일대는 일제만행에 맞서던 민족 저항운동의 생생한 현장이다.

곳곳에 그들을 기념하는 기념비와 고주리, 발안리, 우정·장안면 등에 생생한 현장들이 남아 있어 

화성지역의 독립운동의 현장 일대를 방문하는 일일 코스로 다녀와도 좋을 듯 하다. 

수촌리일대의 주민들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웠고 하나가 됐다.

당시에 보여준 민족의식과 불의에 항거하는 저항정신은 우리가 배워야 할 선조들의 놀라운 정신이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라는 제암리 순국기념관의 표어가 다시 떠오른다.





수촌교회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수촌리 674

031) 351 - 2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