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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김해박물관 기획전시 비사벌의 지배자 그 기억을 더듬다

워크뷰 2015. 2. 17. 10:09


 국립김해박물관 기획전시 비사벌의 지배자 그 기억을 더듬다 


김해에 있는 국립김해박물관을 찾았다.

지난해 10월부터 열리고 있었던 기획전시회가 이제 얼마 남지않았기 대문에 급히 관람하러 왔다

"비사벌의 지배자 그 기억을 더듬다"

이제 타임머쉰을 타고 창녕의 옛이름 비사벌로 날아가 보자



창녕의 옛이름인 비사벌은 붉은 벌판을 뜻한다.

원삼국시대에는 마한 54국, 진한 12국, 변한 12국, 총 78개의 소국이 존재하였다.

창녕은 변한 12국중 불사국이 주변 소국을 규합하여 비화가야로 성장발전하였다.

비화가야는 강대국 신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전쟁수행능력이 뛰어 났으며,

관산성전투에서 신라에 망하기 전까지 600년동안 비화가야만의 독특한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파헤쳐진 비사벌의 문화유산을 우리 손으로 되살리고 

고대 정치체 비사벌의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살펴보는 좋은 자리가 될것이다.



제1부 교동이 발굴되다




조선총독부 문서

소화 5년 (1930년) 매장물 관련된 문서로 창녕에서 발견된 유물 목록이 기록되어 있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의 최초의 정식발굴 주사는 1918년 하마다 고사쿠, 우메하라 스에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21호분과 31호분, 2기의 큰 무덤을 약 10일 만에 조사하였다.

같은 해 12월 부터 1919년 1월에 걸쳐 아츠이 셍이치 등에 의해서 창녕읍 고분 9기가 발굴되었다.

그러나 정식발굴조사보고서가 간행되지 않아 정확한 실체를 확인하기 어렵다. 

이후 일본인 고미술 수집가들의 대규모 도굴과 훼손이 있었으며, 일본으로의 불법반츨등 문화재는 수난을 겪었다.




제2부 교동, 우리 손으로 고민하고 살펴보다.

무덤을 어떠한 방법으로 쌓았을까


일제강점기대의 교동1군 7호분의 조사는 봉토 정상에서 무덤방까지 파내어 내부의 부장품을 수습하였다.

때문에 무덤에서 무엇이 출토되었는지는 알 수 있지만 무덤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밝히지 못하였다.

때문에 우리문화재연구원과 창녕군에서 실시한 교동1군 7호분의 재발굴 조사는 

일제강점기 조사에서 밝히지 못했던 봉토를 쌓는 방식과 

시신 및 부장품을 넣어두는 곳의 구조를 밝히는데 가장 큰 초점을 두었다.


창녕 교동 1군 7호분 출토 동물유체


제3부 비사벌의 중심지, 계성과 교동에 큰 무덤이 자리잡다.


 

창녕이라는 지명은 940년(골 태조23)에 개칭되었다.

신라시대는 화왕군이었으며 원래는 비자화, 즉 비사벌이었다.

비사벌의 영역은 북으로 현풍과 창녕읍, 남으로 계성과 영산을 포함하는 견해와 토기문화상 등을 근거로 

현풍을 별도의 정치체로 보는 의견이 있다.

창녕은 낙동강 중하류역 동안에 넓게 펼쳐진 지역이다.

이와 같은 니리적 특성으로 가야와 신라의 문화가 융합되어 독특한 분위기를 보이는 곳이었다.

오늘날 창녕에는 계성과 교동, 두 굿에서 큰 무덤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다.





제4부 비사벌의 지배자를 말한다

창녕의 계성, 교동,송현동 고분군에는 거대한 봉토를 가진 무덤들이 밀집해 있다.

무덤에 묻힌 자들은 당시 비사벌의 지배자들로  그 권위와 권력을 상징하기 위해 무덤을 거대하게 만들고 

생전에 사용하던 다양하고 화려한 물건들을 함께 묻었을 것이다.

다양한 유물을 용도별로 나누어 살펴보자.


위세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장신구


위세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장신구

비사벌의 지배자 몸에 치장된 장신구는 신라와 아주 유사하다.

비사벌은 신리의 장신구의 도안을 모방하였지만, 

아름다움과 완성도에 있어서 당시 최고 수준인 신라와 비견해도 좋을 만큼 높은 수준에 있었다.



위용을 뽐내는 무기, 무구

무기와 무구는 지배자의 군사력을 상징한다.

교동과 송현동의 고분군의 큰무덤에 묻힌 다량의 무기와 무구도 지배자가 군대를 조직화 하고 군사력을 통제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무기와 무구는 당대 가장 뛰어난 제작기술을 보여준다.

그들은 철을 이용하여 다양한 무기뿐만 아니라 방어를 위한 철갑옷도 만들었다.

금이나 은으로 장식된 화려하게 장식된 긴 칼은 정치적인 지위나 신분을 드러내는 위세품이면서 군사지휘관을 나타내는 대표적인것이다.



영상을 통하여 지배자의 장신구를 보여주고 있다.


화려함을 뽐내는 지도자의 마구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교통수단 마구

화려한 장식마구는 5세기대 이후 금과 은 등으로 만들어졌다.

이런 마구가 만들어지는 것은 말을 단순히 탈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위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사용하였음을 보여주는것이다.

비사벌은 입주부 말띠꾸미개와 편원어미형 말띠드리개와 같이 신라의 화려한 장식마구를 많이 수용하여 벌존하였지만 달개형 말띠꾸미개와 같은

신라에는 없는 독창적인 마구를 제작하여 집자의 화려함을 뽐내고 있다.



 




저승에서 사용하기 위한 것을 담는 그릇


  

비사벌의 큰무덤에는지배자가 누렸던 여러 물건을 넣었다.

무덤에는 청동, 흙, 나무 등 다앙햔 형태와 재질로 만든 그릇을담았다.

구체적으로 무덤에서 출토된 그릇은 어떻게 사용되었던 것일까.

송현동 6호분에서 출토된 그릇을 보면 마치 제사상을 차린 듯 계획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릇들은 5~6명씩 소쿠리에 담긴 채 출토되었고 안에는 밤, 참외 씨, 복숭아 씨, 참다랑어 뼈 등이 담겨 있었다.

또한 그릇은 다양하고 다채로운 장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특히 비사벌의 토기는 오늘날 우리가 "창녕양식"이라고 부를 정도로 독특한 비사벌의 개성을 잘 드러낸다.


부를 상징하는농공구


무덤에 묻힌 농공구는 지배자가 생산을 조절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철로 만든 농사도구는 살포, 따비, 낫으로 견고하고 실용적이어서 생산량 향상에 많은도움을 준다.

대표적으로 단아구는 단조품을 만들기 위한 도구이다.

단조는 도구로 청덩이를 두드려서 원하는 형태의 철기 만드는 방법이다.

철덩이는 판상쇠도끼와 덩이쇠가 있고 단조도구로 집게, 망치, 끌, 정, 받침모루, 숫돌 등이 있다.


비사벌의 대외교류


비사벌의 옛땅인 창녕은 낙동강을 통해 주변의 가야를 포함하여 여러 지역과 교류를 하였다.

교류를 통해 일상적인 토기부터 정치적인 성격이 강한 위세품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교환되었다.

특히 비사벌의 토기는 현재 "창녕양식"이라 불릴정도로 독특하며, 김해와 마산 등의 남해안 지역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비사벌은 낙동강 동안에 위치하여 낙동강을 경계로 가야와 신라가 양립하는 상황을 잘 이용할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양지역을 연결하는 중계역활을 수행하였다.

특히 신라가 낙동강 서쪽으로 진출하는데 비사벌을 요충지로 주목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금공품 등 화려한 신라의 황금문화가 비사벌로 전해지게 되었다.


비사벌의 신라문화


비사벌이 언제 신라화 되었는가는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과제이다.

그러나 다른 가야에 비해 비사벌은 일찍부터 신라에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일 것이다.

비사벌에서 보이는 신라문화의 영향은 은제허리띠, 귀걸이 등의 금공품, 철모를 포함한 무기, 무구, 신라적인 마구 등을 통해 확인된다.


제5부 새로 쓰는 우리역사


일찍이 비사벌은 주변의 가야, 신라와 교류하며 그들만의 문화를 꽃피웠다.

창녕의 큰 무덤과 부장품들은 화려했던 비사벌 문화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비사벌의 지배자를 조망해보고자 하였다.

현재 비사벌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큰 무덤, 즉 지배자의 무덤과 그 안에 부장된 물건이다.

지배자의 통치이념이나 법 등을 알수 없지만 무덤에 묻어둔 물건의 추적을 통해 그들의 삶을 삺펴볼수 있다.


국립박물관은 일제강점기에 조사되었으나 보고 되지 못한 유적, 유물들을 연차적으로 정리하여 보고서를 발간하고 있다.

국립김해박물관

경남 김해시 구산동 232

055) 320 - 6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