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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경남여행 진해 웅천읍성 복원현장을 가다

워크뷰 2015. 12. 28. 06:01

진해 웅천읍성 복원현장을 가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15호이며, 경남 창원시 진해구에 있는 조선시대의 읍성지이다.

1407년(태종 7년) 일본과의 선린책으로 내이포를 개항하여 일본과 무역을 하게 되자, 일본인의 불법거주가 많아져 이를 막고 읍면을 보호하기 위하여1437년(세종 19) 웅천수군첨절제사영으로 축조한것이 이 석성이다.


웅천읍성 복원예정도와 지금의 다음지도 스카이뷰를 비교하여 보니 지금 현재 동문쪽만 복원이 되어 있는 상태다.

어느정도 시간이 흘러야 웅천읍성 본래의 모습을 간직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웅천읍성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 16년에 남해안지역에 출몰하는 왜구와 인접한 제포왜관의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축조된 연해읍성이다. 

읍성은 지방의 주요거점에 군사적인 기능과 행정적인 기능이 복합되어 축조된 성곽으로 웅천읍성은 남해안지역에 축조된 연해읍성이다.

이 웅천읍성은 왜구의 침입과 조선전기에 개항한 삼포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왜인거류지가 조성되어 있는 제포와는 불과 1Km남짓 떨어져 있으며, 

삼포왜란 당시 왜인들에게 함락되어 동문이 소실되기도 했다. 

이후 임진왜란시 웅천왜성의 자성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종결된 이후에도 조선군의 대일본방어의 최일선 기지로서 

역할을 수행한 역사적으로 중요한 성곽이라고 할 수 있다. 

웅천읍성은 2001년도부터 2008년도까지 4차례에 걸쳐 직간접적인 조사가 이루어져 

동벽, 남벽 체성부, 동문지, 옹성, 동북, 동남 치성, 북, 동, 남쪽의 해자가 확인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웅천읍성은 1434년 세종 16년에 둘레 3400척, 높이 15척으로 초축된 이래 문종과 단종동[에이르기까지 

수차례의 수개축이 이루어졌으며 특히 평면형태의 경우 정방형의 읍성에서 장방형의 윱성으로 증개축 되었다. 

채성부는 세종조 축성신도가 반강된 전후의 축조양식을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해자는 초축 해자 및 증축해자가 확인되고 있고 

또한 해자 내 도개교 및 목익(적이 해자를 넘어오지 못하도록 바닥에 박아 놓은 나무말뚝)이 확이되었다. 


웅천읍성 동문은 적의 화력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 옹성을 설치하였다.


웅천읍성 동문으로 갈려면 해자를 건너가야 한다.


지금은 관람객의 편의를 위하여 고정다리가 놓여 있지만, 축조 당시에는 해자조교를 설치하였다.


웅천읍성 해자조교

웅천읍성 동문지 옹성 바깥해자 내에서 해자를 건너기 위해 설치된 교각의 하부구조로 추정되는 목재기둥이 2열 4조로 확인되었다. 

이곳에서 확인된 이 교각의 기둥은 옹성 개구부로부터 동남쪽으로 15m지점에 해당하는 지점으로 동문지 옹성외벽과는 약 9m 이격된 지점이다.

이 목재기둥들은 동문지 옹성과 수평하게 반원형을 이루며 축조된 폭 4.6m의 해자 내부에서 확인된 원형의 통나무재로

현재 해자의 바닥으로부터 잔존높이 20.5~80cm로 확인되고 있다. 

직경은 각각 25, 28, 34, 35cm이며, 앞뒤 간격은 74cm로 부터 182이며 좌우 간격은 3~3.25m로 확인되고 있다.


웅천읍성의 동문지 옹성은 반원형의 편문식으로 체성과 동시기에 축조하였다. 

현재 확인되는 웅성은 전체 직경 18m, 내벽직경 약 13m이며 옹성의 외벽 둘레는 52m, 내벽 둘레는 27m이다. 

잔존 최고 높이는 약 3.5m정도이다. 옹성 체성부 폭은 약 3.5m로 내벽의 경우 약 3단 정도가 나타나고 있다. 

옹성의 개구부는 북쪽을 향해 약 폭 4m 정도로 확이되었다. 옹성 체성부는 성석의 면의 크기는 2m*1.5m*1.2정도의 것이 대부분이며 

하부에서 상부로 갈수록 그 크기가 작아진다. 

1.5m 정도까지 팥석으로 깐 기단석이 돌출되어 있고 그 위에 지대석을 설치하고 약 20cm 정도까지 판석으로 깐 기단석이 돌출되어 있고 

그 위에 지대석을 설치하고 약 20cm 정도 많으며 유물 역시 자기편 일부와 기와편 등이 소량 확인되고 있다.


옹성으로 보호받고 있는 동문.


웅천읍성 동문루



동문에서 바라 본 옹성너머 모습


읍성안으로 들어와 바라 본 동문루의 모습

문루

문루는 성문의 출입통로 상부에 마련된 누가 있는 건물을 말한다. 성문의 문루는 성내외의 출입을 통제하기도 하고, 

전투시에는 장수의 지휘소로 이용하는 건물이 됙도 한다.

발굴조사 결과 문루의 하단부에 해당하는 0.8m크기의 대형 활석을 사용하였으며, 확돌이 2개소 확인되었다. 

복원된 웅천읍성 동문루는 단중문단루로 지붕형식은 팔작지붕이며, 문루의 공포형식은 이익공이며 

평면형태는 정면3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문루는 올라갈수 있는 관람용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동문루에서 바라보니 성곽과 해자의 모습이 잘 보인다.


반달형으로 축성된 옹성의 모습








옹성에서 바라 본 해자조교의 모습





해자는 성벽 주변에 인공적으로 땅을 파서 고랑을 내거나 자연 하천등의 장애물을 이용하여 성의 방어력을 증진시키는 

방어시설의 하나로서 아주 이른 시기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편적으로사용되던 방어시설이었다. 

웅천읍성에서는 길이 300m의 동벽과 남벽 해자가 확인되었다. 

웅천읍성의 해자는 조선 세종 16년 초축이 시작된 이후 총 3번 이상에 걸친 수해자를 축조하였다. 

웅천읍성 체성부와 해자의 이격거리는 동북벽이 12m, 동문지 옹성 주변 7.2~8.1m, 동남벽은 8m, 남벽 7.5m 이다. 

해자의 폭은 남벽 해자는 하부 폭 4m, 최대 깊이 3m, 동북벽해자는 상부 폭 7~7.6m, 하부 폭6~6.5m, 최대 깊이 3.5m에 이른다. 

전체적으로 단면 U자형을 이룬다. 

웅천읍성 해자의 석축 축조수볍은 허튼층쌓기를 실시하였으며, 또한 초축 해자 바닥에는 젖체적으로 돌이 깔려 있고 

그 사이사이로 목익을 설치한 반면에 증개축된 해자인 남쪽 구간에서는 해자벽에 붙어 약 1.2m 간격으로만 나오고 그 안쪽으로 목익이 확인된다. 

또한 동문지 옹성 밖 해자내부에서 조교가 확인된다. 



동문루를 둘러보고 다시 계단을 타고 내려온다.


옹성을 빠져 나오면,


동북치성

웅천읍성의 치성은 총 6개로 이곳의 치성은 동문을 보호하기 위해 축조된 적대이다. 

치성은 체성부에 덧대어져 축조된 것으로 길이 8.4m 너비 5.5m정도의 규모이다. 

축조수법은 체성에 비해 조잡하고 특히 상단부의 약 2.3m 부분은 후대에 개축한 것으로 보인다. 치성의 축조수볍은 체성부와 동일하며, 

축조시점은 절대년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문종실록에서는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문종조에는 필축된 상태가 아닌것으로 판단된다.   


동북치성에서 바라 본 동문 모습


수구

웅천읍성의 배수시설

웅천읍성 내 객사의 오수배출구로 보고 있다.


성벽너머로 웅천초등학교가 보이는데 예전 웅천객사가 있던 자리이다.


객사가 있었던 자리의 웅천초등학교 교사.


이곳은 아직 복원되지 않은곳이다, 언젠가 복원되어서 제자리를 찾기 바란다.



웅천읍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