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교회

아름다운교회 순례 전남 강진읍교회 선교100주년 기념관

워크뷰 2017. 2. 27. 06:00

아름다운교회 순례 전남 강진읍교회 선교100주년 기념관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1919년 4월 4일 강진군 강진장터 독립 만세시위를 격발시킨 강진읍교회 종소리

오전 12시 정오를 알리는 교회종소리가 강진읍에 울려퍼지자 일제히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전국적으로 독립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강진읍에서는 김안식 등 학생 그룹과 함께 

강진읍 교회 교인인 이기성 황호경 김현봉 및

남포리 교회 교인인 강주형 박영옥 등 기독교인들이 만세시위를 계획합니다.

이들은 4월 4일 강진 장날에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협의하고 태극기와 선언서 등을 제작하였습니다

강진읍 교회의 전도사로 있던 최복삼은 기독교인들 대상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후원금을 모금하다 

일경에 체포되기도 하였습니다.


강진읍교회는 1913년 11월 17일 설립됩니다. 

1914년 1월 탑동 207번지에 한옥 5칸을 구입하여 첫 예배당을 마련하였으며, 

1917년 3월 초대 조명선 조사께서 사역합니다.


설립된 이듬해 1월 5칸 한옥을 구매, 헌당예배를 드립니다. 

이후 교회의 고난은 계속 이어지는데요.

1919년 4월에는 3.1 운동사건으로 이기성 성도를 비롯한 13명이 구속됐습니다.

그리고 1940년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성도들이 투옥됩니다.


만세시위를 계획한 인물중 강진읍교회의 이기성은 (1894년 1월 19일~1944년 8월 5일) 전라남도 강진 사람입니다.

황호경 등의 청년 기독교인들과 동경 유학생인 김안식과 함께 3월 25일 강진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시위를 일으키려고 계획하고 사전 준비합니다


그러나 사전에 일제에 탐지되어 12명의 주동자가 체포되었고, 그는 다행히 은신하였으나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받습니다.

그러던 중 배제 학교 학생인 오승남이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선언식과 독립 만세시위에 참가하고 

만세시위에서 받은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숨겨서 3월 31일 귀향합니다.

오승남과 동리 청년들과 함께 만나 서울의 정황을 전해 듣고 이기성은 다시 용기를 얻어 독립 만세시위를 추진하기로 합니다.


이기성은 1919년 4월 4일 강진읍 장날을 이용하여 오승남 황호경 등과 함께 독립 만세시위를 주동합니다.

 4월 2일 동지들과 만나, 4월 4일 강진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시위를 거사하기로 결의하는 한편,

읍내 남포리교회의 강주형 박영옥 김춘석 등을 찾아와 함께 거사할 것을 의논하여 기꺼이 찬동을 얻고,

또 참가를 위하여 미리 독립 만세시위 계획을 알려주는 한편


밤을 새워가면서 태극기 3백여 매, 독립선언서 70여 매, 독립가 20여 매를 등사하여 둡니다.

4월 4일 오전 9시에서 자기 집에 주동자들을 모이게 하여 독립 만세 시위방법을 최종적으로 점검하고, 

준비된 유인물을 각기 분담하여 동성리장터에 갖다두었다가

거사 신호인 강진읍 예배당의 정오(正午) 종소리가 울리고, 김후식이 군청 뒤 산마루에 대형 태극기를 세우자,

동지들이 분담되어 1천여 명의 시위군중에게 유인물을 나누어주고, 독립 만세를 선창하면서 선두에서 시위행진을 주동합니다.

이때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강진 보통학교 학생들이 교정을 뛰쳐나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합류하여 

시위군중의 사기는 더욱 충천하였습니다.


그러나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과 헌병의 발포로 말미암아 맨손으로 일어난 시위는 중단되고 주동자들은 체포되고 맙니다.

이기성도 체포되었으며, 결국 이해 6월 30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릅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습니다.

註·판결문(1919. 5. 21 대구 복심법원)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613·614·615·616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546·1,547면


배영석 목사 : 1905년 8월 3일 전남 곡성에서 출생했으며, 

배영석은 강진읍에서 김재옥, 김원들과 함께 3.1상회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3.1상회는 먼저 민족혼이 3.1만세 운동에 담겨 있다는 뜻과 세 사람이 똑같이 예수를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아버지, 상회를 통해 믿음이 성장하며 철저한 십일조 생활로 교인의 본분을 다하게 하시고 

저축의 본을 보여 모은 돈은 주님 영광을 위해 쓰게 하소서." 였습니다.


배영석은 조선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강진 항촌중앙교회에 부임합니다. 

그 후 배영석 목사는 나주 파남교회에서 시무 중 8.15해방을 맞이하게 됩니다. 

배영석 목사는 해방 후 강진읍교회에서 교회, 노회, 지역 발전을 위해 강진군민 회장까지 맡게됩니다. 


그런 와중에 6.25가 일어나 인민군은 강진읍까지 진격해 옵니다. 

장로들은 배영석 목사를 찾아와 “목사님, 여기 앉아 있으면 죽습니다. 어서 피하십시다”라며 간청했다.

배영석 목사는 장로들의 강압에 못 이겨 피난선에 몸을 실었을 때 “내가 양무리를 두고 도망을 치다니...” 

후회하는 마음이 들어 뱃머리를 돌려 다시 강진읍교회로 다시 돌아옵니다. 

돌아온지 이틀 후에 배 목사는 공산당 내무서원들에게 체포되고 맙니다.


1950년 8월 6일. 공산당원들은 강진읍 장터에서 인민재판을 합니다. 

죄목은 인민의 피를 빠는 악덕배요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며 국민회장을 지낸 반동분자란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나는 예수교 목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 믿고 회개하시오. 말세가 임박했습니다."고 말하자 사정없이 총알은 불을 뿜었고 그의 피는 주위의 땅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그는 45세를 일기로 순교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공산당은 시신마저 손대지 못하게 하여 그들이 후퇴한 후에야 그토록 아끼던 교회 옆 솔숲사이에 안장하고 

새하얀 작은 비석을 세워 그의 성역과 순교를 새기어 지금까지도 기리고 있습니다.

(내용 출처 : 한국기독교회사 강진읍교회 http://photohs.co.kr/xe/cn_ungdong/7286)


강진읍교회 4층에는 선교100주년 역사관이 있습니다.


1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자료들이 많이 있어 하나하나 보면 그 역사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됩니다.



우리 선조들의 생활용품도 전시되어 있어 민속박물관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아동부의 그림을 보며 강진읍교회의 100년 역사를 다시 한번 생각하여 봅니다.


강진읍교회

전화번호 : 061-434-8001

전남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 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