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도보 여행/역사길

[정공단]정발장군이 전사한 부산진성의 남문에 세워진곳

워크뷰 2011. 3. 31. 06:59



증산공원을 빠져 나온후

동구도서관과 증산공원 사잇길로 내려 가는 길이 보이길래 내려 가 봅니다

좌성초등학교 쪽문이 보입니다




한 가정집에서 기르는  닭입니다^^


한때 부산시민들의 휴식처였던 삼성극장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그냥 방치되고 있는것 같습니다


잠시 후 정공단의 담벼락이 저를 반깁니다


이곳은 바로 정발장군을 모신 정공단입니다
높은곳에 위치한 외삼문이 위압적으로 느껴집니다











 

지난 임진년의 왜란때에 부산의 첨사 정발공은 사기를 돋우며 성을 돌아다니면서 왜적을 무수히 쏘아 맞추어 하루만에 적의 시체가 산처럼 쌓인곳이 세곳이나 되었다.화살이 떨어지자 부하장수들이 성을 빠져나가 구원병을 기다리자고 간청하였다,공은 "나는 이 성의 귀신이 될것이다,또 다시 성을 포기하자고 하는 자는 목을 베겠다"고 하니 군사들이 모두 흐느끼며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얼마 후 공이 탄환에 맞아 절명하니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공의 막료인 부사령 이정현공도 곁을 떠나지 않고서 죽었고,공의 애첩인 애향도 공의 죽음을 듣고 달려와 곡하고 시신 곁에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으며, 공의 노복인 용월도 또한 적에게 달려들다 죽었다. 그 후에 왜장은  "귀 국의 장수 중에 부산의 흑의장군이 가장 두려웠다"고 하였다.이는 공이 싸울때에 검은 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난이 평정된 뒤에 조정에서는 공에게 좌찬성의 벼슬을 추증하고 시호를 중장이라 하였으며 동래부사 송상현과 함께 충렬사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또 동래성 남문에 비석이 있어 공이 순절할 때의 일을 상세히 적어 놓았으니 공을 찬양하는 일은 이것으로 거의 남김없이 다 하였다고 할수 있다.그러나 부산진성은 공이 목슴을 바친 곳인데도 돌에 새긴 기록이 한 점도 없었다,임진왜란 후 170년 만에 박재화가 왕명을 받들어 경상좌도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에 머물게 되었다, 한 번 부산진성에 올라 공의 남긴 자취를 돌아보고 자연히 탄식하여 "이 곳에 어찌 충장공의 전망비가 없을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이에 돌을 케어 영가대옆에 세우고 사적을 비석뒤에 새긴다,
아! 부산진은 나라의 목에 해당하는 남쪽 요새이고 섬의 오랑캐 배가 오가는 첫지점이다,공의 이름을 새기고 공의 사적을 기록하여 이 곳에 세우는 것은 변방의 민심을 격동하게 하고 적의 간담이 떨어지게 하기 위해서이다.세 자의 골은 비석이 견고한 성곽과 물샐 틈 없는 방벽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수 없으리라,만력 임진년 170년 뒤 신사년(1761,영조 37)여름에 절충장군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박재화는 명을 지어 말한다

산악이 우뚝 솟은 것 높다할 것도 없고/ 해와 달이 빛나는 것 밝다할 것 없네/ 오직 공의 절개만이 세상의 기둥이 되니/ 고립된 성의 일편단심 만고의 모범일세/ 노복과첩의 충직함도 한 집안에 우뚝하고/막료인 이공도 당나라 남팔처럼 늠름하였으니/ 짧은 비석에 적기 어려워도 깊은 바다처럼 다하지 않으리

통훈대부 전령사강원사서 춘추관기서관 황간이 쓰다
신사년 7월 세움 




비석명을 순서대로 나열하였습니다






굳게 닫힌 내삼문




문이 잠겨 있어서 들어가 보진 못하고 옆의 부산진교회 육교위에 올라가서 촬영을 하였습니다






 정발장군의 부산진성 전투 알아보기


출처-->http://cafe.daum.net/jayuchon/I7r2/51


출처-->펜저의 국방여행
밀리터리 전문 출판사인 영국 오스프리 출판사에서 출판한 일본왜성(城)1592-1598에 부산포해전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의 전력 비교
조선군                      일본군
병력 600명                18,700명
선박   3척                     700척


일본군이 흑의장군(검은 옷을 입은 장군)이라 하여 두려워 하였던 정발장군
정발장군과 궁사들의 화살로 죽은 일본군이 3개의 산이 될 정도로 쌓였음

아래는 정공단에 있는 안내지를 스캔한것입니다








경기도에 있는 정발장군의 묘에 관하여 상세한 기록이 있는 동영상을 빌려 왔습니다

 "성 안에 남아 있는 것들은 모조리 죽여라. 피를 흘릴 수 있는 것들은 개나 고양이까지도 남김없이 죽여, 그 피로 전쟁의 신에게 제사(血祭)를 올릴 것이다." ('서정일기' 참조)

성을 함락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병졸들은 이미 광기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아악! 살려주세요!" "칙쇼! 모두 죽여라!" 일본도가 빛을 받아 번득일 때마다, 선혈이 튀며 흰옷에 붉게 물이 든다. 300호 마을은 불에 타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칼날 부딪히는 소리와 높은 비명만 낭자하게 성 안을 가득 채울 뿐이다.

"애비가 죽은 곳에 아이가 울고, 아이가 죽은 곳에 어미가 칼에 베어 죽어나가기를 반나절. 성 안에는 3천의 시신들로 산을 이루고, 그들의 피로 강을 이뤘다.(屍山血河)"

성을 함락하고 '도륙의 성찬'을 마친 뒤, 왜군들이 한 일은 부산진성(釜山鎭城·지금의 금성
고등학교
뒤 구릉 일대)을 허물어버린 것. 부산진 지성(釜山鎭支城·지금의 자성대 자리)도 함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철저하게 흩어버렸다. '우리 앞을 가로막으면 모두 이렇게 될 것'이란 상징적 경고. 그렇게 조선의 성들은 차례로 허물어지고 만다.
출처-->
부산일보

일본군은 부산진성을 함락후 그 흔적을 완전히 없애어 버렸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정공단은 일제시대때 독립투사들의 정신적인 장소가 되었다
대표적 인물로 박진혁이 있는데
부산경찰서 폭파사건(1920년)을 하기전 정공단에 와서 예를 갖추고 거사를 진행하였다

일본은 정공단이 민족의 정기를 일깨운다 하여 정공단의 소장품을 없애 버렸고
비석들은 여러곳의 땅속에 묻어 버렸다

광복후 주민들이 하나둘 찾은 비석들을 이 곳에 다시 모은 아픈 역사의 현장입니다

부산진성의 함락과 함께 전사한 정발장군과 관련인물들을 모신 정공단 입니다
글을 쓰면서도 눈시울이 뜨거워져 옴을 어찌 할수가 없습니다!

동구 초량에 있는 정발장군 동상

네이버항공지도로 바로 보기-->http://map.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