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경상남도

[용지공원]경상남도 창원시

워크뷰 2011. 4. 13. 03:14

창원통일관을 관람한후 도로를 하나 건너면 용지공원이 나타납니다







고향의봄 이원수 노래비(용지공원 내)
경남 양산시에도 이런 비가 하나 있는데 아래에 올렸습니다


경남 양산시 춘추공원의 이원수 노래비입니다

보러가기-->[양산 춘추공원]그리움이 우물처럼 깊이 담긴 고향의 봄을 느낄 수 있는 곳









새영남포정사
2층의 현판에는 망미루라고 쓰여 있습니다






타임캡슐을 묻은 장소라고 합니다
70년뒤의 창원은 어떻게 변해있을까요^^




















정열공 최윤덕 장상 신도비

조선조 초기의 무장, 자는 여화, 호는 임곡, 시호는 정열공,
본관은 통천, 지중추부사 운해의 아들.
고려 우왕 (1376년)에 창원시 북면 내곡리 무등촌에서 태어났으며,
1446년에 사망하였다. 

14세때 활쏘기를 잘하여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학문은 양촌 권근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9세 때인 조선조 태조 3년에 갑무과에 합격하였다. 21세때 부친을 따라 영해의 반포에서 왜적을 격파하였다.  
 

1419년(세종 원년)에 삼군도절제사로서 대마도에 출정하여 점령하고 천신산에서 대마도 도주의 항복을 받았다. 세종 15년 계축에 야인 이만주가 압록강의 지류인 파저강을 건너 침입하여 인민을 학살하므로 장군이 도절제사로서 평안·황해 2도 군병 1만5천을 거느리고 출정하여 야인을 격퇴하였다. 세종 15년 왕은 선위사 박신생을 군영에 보내어 여러가지 물품을 하사하였다. 장군이 개선하는 날, 세종은 근정전에서 큰 연회를 베풀고 왕이 친히 술잔을 잡아 위로하였다. 세종 16년 우의정이 되었다. 이것은 무인에게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장군은 관직을 맡아서는 청렴결백하여 청백리로서 이름이 남았고 장수로 30년을 지내면서 그 위력이 변경에까지 알려졌다.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세종은 애도하여 3일간 조회를 하지 않았으며, 제사 물품을 하사하고 시호를 정열공(貞烈公)이라 하였다.
세종 조정에 배향되었고 평안도 안주 청천서원에 봉향되었으며 통천 풍계사(楓溪祠)에 봉향하였다. 묘소는 창원시 북면 대산리 갈전 부락 뒷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조 초기의 방형묘로 이 부근에서는 볼 수 없는 큰 분묘이다.
정열공은 우리 고장 창원에서 탄생한 역사적 인물로 우리 고장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공의 정려각(旌閭閣)은 창원시 소답동(구 창원읍 동문 밖)에 있고, 정열공 최윤덕 장상 신도비를 1996. 5. 20 건립 창원시 용지공원에 있다.

출처-->http://blog.naver.com/sctao

창원시청옆에 설치되어 있는 동상


지금은 경복궁(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건되어 있다는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보물 제362호)과 탑비(보물 제363호) 모형이 서 있다.







불곡사지에서 나온 석탑재를 가져와 삼층석탑으로 복원했다는 탑과 비석들



불모산동사지 삼층석탑
창원시 불모산동은 과거에 미륵동이라 불릴 만큼 많은 사찰과 암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에도 고려시대 양식의 석불입상과 통일신라시대 양식의 석탑 부재들이 널리 분포하고 있는데, 뜻있는 사람들이 불모산동 사지에 자리하였던 탑재를 옮겨와 복원, 건립하였습니다.
원 탑재는 불모산동 산199번지 소재의 불모산동 사지에 자리하였고.
그곳에 있던 석탑의 부재만을 옮겨와
1989년 1월 30일 창원시청 뒤 용지공원 안에 복원하였습니다.
절의 연혁이나 사명(寺名)에 대해서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이 탑은 통일신라 양식의 삼층석탑으로,
옥개석 2매와 탑신석 1매, 장대석(長大石), 상륜부 등이 절터에 있던 원래의 부재입니다.
 장대석의 크기는 130×64×43m, 186×49×48m, 117×42×63m 등입니다.







‘사인 김기섭 송덕기념비(士人金基燮頌德記念碑)




이곳 비석군은 각 비석마다 옆에 안내석을 두었는데 보기에 상당히 편리합니다

다음지도로 보기-->http://dmaps.kr/2gmd

도심의 중심에 이런 공원이 있다는것과
그 속에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는게 너무나 자랑스러운 창원시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