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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 전사이가도난"戰死易 假道難"

부산 도보 여행/역사길
지난주 청도읍성을 다녀오고나서 부산에도 동래읍성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부산에 살면서도 부산의 읍성을 가지 않는다면 이것 또한 부산시민의 본분이 아닐것 같아서 오늘부터 부산에 있는 읍성을 다녀보기로 하였답니다,그중에 처음으로 동래구 안락동에 위치한 충렬사를 찾았습니다.

렬사는 1592(선조25)년 임진왜란때 부산 지방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호국선열들의 위패 89위를 모신 사당으로 선열들의 충효사상을 가꾸어온 호국정신의 요랑지로 성역화 되어있으며 1605년(선조38년) 동래부사 윤 훤이 임진왜란 때 순절한 송상현공을 봉사하기 위하여 동래읍성 남문안(동래 경찰서 자리)에 宋公祠를 건립하고 위패를 모셔 매년 제사를 지낸 것이 오늘날 충렬사의 시초가 되었다.
충렬사 홈페이지 바로가기-->클릭



임진왜란 원인

국내
오랜 평화와 성리학의 발전,이민족에 대한 지나친 우월감으로 국방 정책에 소홀하였다.
특히 이이의 십만 양병설을 무시하였으며 양반 계급끼리의 세력 싸움으로 국론이 분열되었고 조세 제도 문란으로 민심이 극도로 혼란하였다.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등장하여 100 여년 간 계속되어 온 내란을 수습하고 통일 국가를 수립하였다.

그는 자신에 대한 불평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쏠리게 하고, 아울러 자신의 침략적 야심을 펴기 위하여 우리 나라와 명에 대한 침략을 준비하였다.


임진왜란의 시작
선조 25년(1592)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조선 침략 선봉군 제 1군 18700명을 실은 칠백여 척의 대선단이 쓰시마를 출항, 부산 앞바다에 몰려 들어 옴으로써 임진왜란은 시작되었다.
당시 부산진성에서는 수군첨절제사 정발이 천여 명에 불과한 병력을 거느리고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부산진성 함락
일본군 조총부대가 부산진성 서문 밖 고지에서 성안에 사격을 퍼부어 성벽 위의 조선 군민들이 고개를 들지 못하는 틈을 타서 성벽을 타고 넘어 들어갔다. 이와 같이 하여 성안에서는 치열한 백병전이 전개되었고, 부산진성의 수장인 정발은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남은 군민들도 창칼이 부러지고 화살과 돌이 바닥날 때까지 선전 분투하였으나, 마침내 이날을 넘기지 못하고 부산진성과 더불어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다음로드뷰로 보는 초량지하철역에 위치한 정발장군 동상 보러가기 -->클릭

-다대포함락
초전에서 부산진성을 점령한 고니시군은 승전의 여세를 휘몰아 인접지역인 서평포와 다대포에 공격을 가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이 때 순사한 다대첨사(多大僉使) 윤흥신(尹興信)을 추배하였다
부산진성을 점령한 고니시군은 4월 15일에 그 선두부대를 동래성 근처로 이동시켰다. 동래성에는 부사 송상현을 비롯하여 조방장 홍윤관, 양산군수 조영규, 울산군수 이언성 등이 군민을 거느리고 일본군의 공격을 방어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다음로드뷰로 보는 부산진역에 위치한 윤흥신동상 보러가기-->클릭

-동래성 함락
일본군은 동래성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하고 나서 동래성 남문밖에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내놓아라"는 푯말을 세워 놓고  동래성 군민들에게 항복을 촉구하였다. 그러자 송상현은, "싸우다 죽기는 쉽되,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는 글을 쓴 판자를 성밖에 던져서 끝까지 항전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일본군은 동래성에 대규모의 공세를 감행하였다. 일본군은 부대를 3개대로 나누어 동래성에 대규모의 공세를 감행하였다. 일본군은 부대를 3개대로 나누어 동래성 동, 서, 남 세 방면에서 조총 사격을 퍼부으면서 까맣게 성벽으로 기어 올라갔다. 동래성의 조선 군민들은 끝내 일본군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하고 동북쪽 성벽이 무너지면서 그 곳을 통해 성안으로 몰려든 일본군에게 성을 함락 당하였다. 
 이 혼전의 와중에서 부사 송상현이 순절하고, 양산군수 조영규 등 군민 대부분도 전사하였으며, 울산군수 이언성은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자료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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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이가도난-(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싸울테면 싸우고 싸우지 못하겠으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달라'
戰則戰矣 不戰則假道
...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전사이가도난
戰死易假道難
-동래부사 송상현 -
.....

결국 왜군은 쳐들어오고 악전고투했으나 송상현은 죽을 각오를 하고 호상에 걸터앉아 조복을 가져오게 하여 갑옷 위에 입고 의연한 자세로 움직이지 않았다. 조용히 호상에서 내려 북향사배하고는 붓을 잡아 부채에

孤城月暈 외로운 성은 달무리 지듯 포위되고
列鎭高枕 이웃한 여러 진은 잠든 듯 고요하네
君臣義重 임금과 신하 의리 무거운 것이오매
父子恩經 아버지와 자식 은정 가벼히 하오리다.

라고 글을 써서 부모님께 하직의 인사를 사람을 시켜 보냈다고 한다



         출처 충렬사 안내 홍보물

다음 로드뷰로 보는 송상현 공 동상이 있는 양정3거리-->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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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로타리 서원시장에 도착하자 버스에서 내렸다

서원시장쪽에서 바라본 충렬사탑

 


충렬사 매표소.








충렬사 안의 연못
여름엔 이 곳에서 금붕어를 바라보면서 더위를 식혀도 괜찮을 듯하다!







금붕어용 먹이 자동판매기.


저 앞에 어머니와 아들이 금붕어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곳곳에 무궁화가 많이 피어있다!









- 임란동래24공신공적비(任亂東萊二十四功臣功積碑) :
임진외란당시 동래지방 출신으로 창의모병하여 왜적과 싸우다 장렬히 순절한
선무원종공신녹권에 등재된 공신 가운데 적을 토벌하는 가운데
전공이 혁혁한 24별전공신의 공적비로 1988년5월14일 제막하였다.



송상현공의 결의와 호국정신을 잘 나타낸 명언비
-전사이가도난-(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충렬사 사무소 건물





-소줄당-
옛 안락서원의 교육도장으로

1652년(효종 3년)에 건립된 강당을
한유(韓愈)의 이제송(吏齊頌)에
나오는 싯구의 첫머리 글자를 따서 당호(當號)를 지었다.








기념관
임진왜란 당시의 전황을 보여주는 6폭의 기록화와 천곡수필등 고서,갑옷,치제문 등의 유품 102점을 소장,전시하고 있다.


출처 충렬사 홍보물



정화기념비
충렬사 정화사업을 기념하여 제작한 비로 호국선열의 정신을 이어받아 민족중흥의 여사적 과업을 이룩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의열각
동래성에 서 기왓장으로 왜적과 싸웠던
두 의녀와 송상현 공과 정발 장군을 따라 순절한 금섬,애향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본 전(本 殿)
부산 지방을 지키시다가 순절하신 선열 89위(남자)를 모시고 있는 충렬사의 본당이다.







바닥에 거북등모양을 얹어 놓았다.



휴계소
지어진지 30여년이 지난 휴계소
단열이나 에어컨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서
조금 더운 편이다





충렬사를 부산에 살면서도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진작에 방문하지 못한것에 순국선열에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오늘 유난히 더운 날 휴계소에서 팥빙수를 하나 사서 더위를 식혀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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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제1동 | 충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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