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도보 여행/역사길

"동래향교(東萊鄕校) " 동래읍성 시도유형문화재 제6호 (동래구)

워크뷰 2010. 9. 2. 07:00

동래향교(東萊鄕校)
 
시도유형문화재 제6호 (동래구) 지정(등록)일1972.06.26
상 세 문 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문화공보과 051-550-4085

장관청을 뒤로 하고 동래향교로 향합니다

향교는 조선 시대의 학교를 이르는 말로
당시 전국 향교를 통해 지방 학동들이 교육을 받고,
뛰어난 인재들은 다시 한양에 있는 성균관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가는길에 보이는 갈비집


공사장 울타리앞에 있는 동래읍성지 안내도
그리고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동래흡성의 성벽







다음 로드뷰로 보기-->클릭

다음 지도로 보기-->클릭


동래향교의 배치도 원본(부산역사교사모임)=>클릭


부산 동래향교 정문인 '반화루(攀化樓)'

강학공간의 정문인
반화루(攀化樓)는
후한서에 용과 봉황을 성철(聖哲)과 임금을 비유한 반룡부봉(攀龍附鳳)에서
 따온 것으로 즉, 성인을 따라 덕을 이루고 임금을 받들어 공을 세우기를 원하는 뜻이다.





부산유림회관입니다


정문이 잠겨 있어서 못들어 가나 햐였는데
옆으로 돌아서니 옆문이 열려 있습니다^^




향교에는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강학했다는 것에서 유래돼
큰 은행나무가 많이 심겨져 있다.


안에서 바라본 반화루의 모습
강학공간의 정문인 반화루(攀化樓)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아래층은 명륜당과 동재, 서재로 들어가는 3문으로 되어 있다.


명륜당(明倫堂)은 학생의 수업을 위한 공간 이며
때로는 유림의 회합장소로도 이용 되는 것인데,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에 포작은 일출목 이익공이며,
기둥은 약간의 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이다.
정면 가운데는 우물마루가 있으며 좌우에는 온돌방이 있다.









반화루에서 바라본 서재
유생들의 가숙사[서류(서얼 등)]


반화루에서 바라본 동재
유생들의 가숙사(양반유생)

유교에서는 동쪽이 서쪽보다 위계상 상위 개념이기 때문에
동재에는 양반유생들이 서재에는 서류(서얼 등)들이 사용했다.

동재, 서재는 초익공 3량 맞배지붕이며 앞에는 쪽마루가 길게 붙어 있다.
 어개구부의 벽체는 판자로 되어 있다.



그당시 동래부사들의 비석들(흥학비)


외심문에서 바라본 내삼문

내삼문 은 무익공 3량 맞배지붕이고,
협문은 둘 다 민도리집으로 된 것으로 보아 외삼문보다 뒤에 만든 것으로 짐작된다.

외삼문 은 전면 3칸, 측면 1칸의 평3량 일출목 이익공집이며
대성전의 중심축에서 완전히 벗어나 강학공간인 반화루의 오른쪽에 위치한다.


내삼문을 옆에서 본 모습


대성전에는 공자 이하의 유학자가 모셔져 있으며


동무


서무
동무와 서무에는 공자의 제자들과 우리나라 유학자 18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곳에서 봄·가을로 ‘석전대제(釋奠大祭)’라는 제사를 지내게 된다.


서장대 올라가는 길의 동래향교 담벼락

동래향교는 1392(태조 1)년에
국가의 교육진흥책에 따라 유현(儒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배향하며
지방민을 교육하려고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동래성 함락과 함께 불타 없어져
 1605(선조 38)년에 동래부사 홍준(洪遵)이 다시 지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로부터 토지와 책·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정원 70명의 학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적인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동래향교에 관한 기록은 일제강점기 약탈로 대부분 멸실되었으나
 향교고왕록(鄕校考旺綠)과 향안(鄕案)이 일부 보존되어 있어 현재 우리나라 향교의 변천사를 연구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