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도보 여행/역사길

[동문]아치형의 동문(東門) 금정산성 4대성문 한바퀴 돌기

워크뷰 2011. 4. 21. 13:47



 부산시 금정구의 부산대학과 범어사 뒷산에 있는 금정산성(금정구 금성동)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성이다.
성곽 길이 1만 7천3백37km, 높이 15~3m, 면적 8.213㎢의 방대한 성이다.



금정산성은 어느 한코스로 지나가보긴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4대문 전체를 한바퀴 돌아본 기억이 없기에
동,서,남,북문을 하나하나 찾아서 돌아 보기로 하였습니다
먼저 도시철도 1호선 온천장역에 내려서
육교를 건너 홈플러스앞의 좌석버스 정류장에서

203번 버스를 탑니다
그리고 동문에서 하차를 합니다

도시철도 1호선 온천장역 길 건너편에서 203번 좌석버스를 타고 동문앞에 내립니다


하산하는 등산객들을 위하여 에어건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 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인 1703년(숙종 29)에 국방의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해상을 방어할 목적으로 금정산에 돌로 쌓은 산성이다.
성벽의 길이는 약 17km,놀이는 1.5~3m이고,면적은 약 8.2km2에 이르는
국내산성
가운데 가장 거대한 성이다.
처음에 산성을 쌓은 것은 확실하지 않으나,고대에 남해안에 왜구의 침입이 심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신라시대부터 성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1667년(현종8년)에
통제사 이지형을 불러들여 왜구의 침략을 방어할 대책을 강의하는 가운데 금정산성에
대해 언급한것으로 보아 1703년 이전에 산성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산성을 축조하자는 논의는 여러 차례 있었으나,1701년(숙종 28)에 경상감사
조대동의 건의로 착공하여 이듬해에 성을 준공하였다.그 후 1907년(순조 7)동래부사
오한원이 동문을 존공하였고, 이듬해에는 서,남,북문의 문루를 완성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한 금정산성부설비가 장전동에 전해온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된 것을 1972년에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974년 까지
동,서,남문을 복구 하였으며,1989년 북문을 복구하였다.
산성의 수비는 동래부사가 맡았으며 중군과 승병장 등의 직책을 가진 중간간부와
군병들의 상비군 및 인근 사찰의 승려가 지켰다.그러나 유사시에는
동래,양산,기장의 3개 읍 소속의 군인과 사찰의 승려가 차출되어 지켰다.
 금정산성은 바다로 침입하는 외적에 대비하기 용이한 낙동강 하구와 동래지방이
내려다 보이는 요충에 위치하고 있어,
조선 후기 부산지방의 국방상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다.


이곳이 금정산성 동문입니다






 

동문은 금정산 주능선의 해발 415m의 잘록한 고개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망이 아주 뛰어나고
동래읍성에서 가장 근접하기 쉬워 금정산성의 으뜸 관문으로 자리하고 있다,
<금정산성 부설비>의
기록에 의하면 "1807년(순조 7년)늦가을에 토목공사를 일으켜
한달만에 동문이 완성 되었다"고 한다.

동문은 ( 형태)으로 문폭은 300cm, 홍예의 높이는 340cm이다.동래부사
정현덕(재임 1867~1874))이 동문과 서문의 재건에 힘을 쓰고 있을 때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두 성문을 아주 완벽하게 세우기 위해 이름난 석공을 수소문한 끝에 사제지간인
두 석공을 찾아 스승에게는 동문을,제자에게는 서문을 짓게 하였다.
서문을 맡은 제자는 기술이 앞서
정교한 아름다움을 살려 스승보다 먼저 짓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스승은 제자의 뛰어난
기술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사람들은
그 스승을 미워하고 제자의 기술을 칭송하였다.

그러나 이들사제는 동문과 서문 공사가 끝난 뒤에는 힘을 합쳐
밀양 영남루 공사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8발에 1,000원 이면 한번 해볼만하네요^^


양궁장에서 바라본 동문






햐! 소나무 한번 멋지게 생겼습니다^^




무슨 공사가 한창이네요




이게 무얼까 생각하다가
 아하
성곽 잇기를 하는 모양이구나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렇네요
성곽잇기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복원공사 중인 성곽과 오래된 옜성곽의 경계선입니다




동문에 오르면 누구나 한번씩 이 소나무에 올라타 사진을 한장씩 찍었었는데
그래서 인지 이 소나무 많이 힘들어 하였나 봅니다!










금정산 대륙봉과 장전동의 모습


바위를 깨뜨리면서 자라는
소나무의 생명력에 감탄이 나옵니다!


뿌리가 흙 밖으로 나온 이 소나무는
물 흡수하기가 많이 힘들것 같아 보입니다





길이 갑자기 깨끗하다 하여 보니 공사를 하였었네요


성곽 끝 부분에 망루가 하나 보입니다




이 곳은 제 2망루 입니다


동문입구 버스정류장 부터 동문을 거쳐 2망루 까지 걸어 왔습니다^^
 
아치형의 동문(東門)
금정산 주능선의 해발 400m의 잘록한 고개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성문은 금정산성을 굳게 지키는 역할 못지 않게 전망이 뛰어나 망루로서도 손색이 없다.

'정묘년(순조 7년, 1807년) 추계(秋季)에 이르러 토목공사를 잇달아 일으켜 한달 만에 동문이 완성되었다. 이듬해 정월에는 기둥과 들보를 백 리 밖에서 운반하고, 벼랑에서 낭떠러지를 깎아내는데 메고 끄는 사람이 구름처럼 많이 모여들어 만(萬) 사람이 힘을 일제히 쓰니 149일만에 서, 남, 북문의 초루(성문 위의 누각)가 완성되었다.

동래부사 오한원(吳翰源)이 금정산성 증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부설비문의 일부이다. 그 자신이 글을 짓고 썼다고 하니, 이것이 동문을 다시 세운 공식 기록인 셈이다.

동문은 동래읍성에서 가장 접근하기 쉬워 금정산성의 으뜸 관문으로 자리한다. '금정산성 부설비'의 기록에 따르면 이 동문은 1807년 음력 10월에 준공한 것이 된다. 특히 동문과 성첩(城堞)은 동래읍민이 일을 맡았고, 나머지 서, 남, 북문과 성곽은 경상감영의 71개 주(州)에서 차출한 민정(民丁)의 부역으로 이룩했다고 한다.

현재의 동문은 지금으로부터 188년 전에 동래부사 오한원이 세운 그 모습이 물론 아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지배를 받을 때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쌓았던 이 성과 성문, 군관아시설이 일제의 만행으로 파괴되어 크게 훼손된 것이다

출처-->금정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