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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제일감리교회/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1905년 설립하여 1913년 서미감병원 개원

워크뷰 2014. 11. 22. 18:00


 [원주제일감리교회/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1905년 설립하여 1913년 서미감병원 개원

강원도여행중 만난 원주제일교회

원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약2.5km 떨어진 곳으로 시내버스로 약 18분의 거리에 있다

원주제일교회와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은 원주기독교사에 미친 영향력이 크다.







<이미지출처: 한국기독교회사>

원주제일교회는 1905년 4월 15일 미국 남감리교회의 무스(J.R.Moose)목사가 세웠으며 당시의 이름은 원주읍교회였다.

무스선교사가 장의원 권사와 같이 원주를 방문, 본부면 상동리 풀밭에서,

한응수, 한치문, 장호운, 김용덕, 엄용문, 윤만영 등과 함께 첫 예배를 드린것이 원주제일교회의 시작이다.

무스선교사에 이어 1897년에 한국에 온 콜리어(한국명 고영복) 선교사가 1907년부터 순회전도사로 교회를 이어받아 더욱 부흥을 하게된다.

의료선교사인 엔더슨(A.G.Anderson) 선교사 내외가 1913년 11월 일산동에 120평 규모의 서미감병원을 세워서 

무료로 치료를 많이 하여 주어 원주읍교회 성장에 큰 공원을 하였다.




서미감병원 터 기념비

성령의 도움과 기름부음을 통해 아픈마음이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나길 우리는 바라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모든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다가오는 해에는 이보다 더 위대한 일들이 주님을 위해 이뤄지길 기도합니다.


서미감병원은 1913년 4월 기초공사가 시작되어 1913년 11월 15일 기한에 맞추어 완공되었다.

건물은 붉은색 벽돌로 지어졌음며 대리석으로 만든 창틀과 외장이 있으며 테두리는 흰색으로 칠하였다.

넓이는 가로 30피트, 세로 40피트(가로 9미터, 세로 12미터)이며 2층 건물이고, 

지하실에 조명 및 위생시설이 갖춰져 있어 실제로는 3층 건물이라고 볼수 있다

건축비의 대부분은 미국 내 스웨덴교회에서 모금되었고, 일부는 스웨덴에 있는 교회에서 모금되었다.

이 기금은 스웨덴교회의 25주년 기념행사의 일부로 스웨덴교회가 한국에 보낸것으로서 

이 병원에 기부한 스웨덴교회를 기리기 위하여 병원 명칭을 

"대한민국 원주 스웨덴 감리교 병원"으로 하였습니다. 1914년 6월 앨빈 가필드 앤더슨


서미감병원

1913년 준공된 서미감 병원 건물은 6.25때 소실되고 

지금 남은 이 건물은 같은 시기에 건축된 것으로 선교사들이 의료선교를 하는 본거지로 활용하였다.

건평 약 200㎡의 이 건물은 강원도 최초의 서구식 건물이다













서미감병원(Swedish Methodist Hospital) 은 미국감리교선교부에서 미국 내 스웨덴 감리교회의 지원을 받아 1913년 11월 15일 개원하였고, 

이는 강원 남부권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이었으며 당시 17개 병상으로 건축되어 세브란스 출신 한국인 의사와 함께  운영되었다.

그러나 1933년 일제의 선교사 추방정책에 의해 운영이 중지되었고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

일제시대와 6.25전쟁을 겪은 후 

1956년 미국 감리교선교부(대표 쥬디목사 C.W Judy)와 캐나다 장로교선교부(대표 모레리박사 F.J.Murray)가 연합하여 옛 서미감 병원 부지에 

원주연합기독병원의 이름으로 다시 개원을 하게된다

1976년 부터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원주기독병원으로, 2013년 부터는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으로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이미지 출처 : 연합뉴스>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발행되는 크리스마스씰을 기억하는가?

결핵환자를 돕기위하여 우편을 보낼때 한장씩 구매하여 우표옆에 같이 붙여서 보내었던 기억들.

이 그리스마스씰이 1953년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의 초대원장이었던 문창모박사에 의하여 재발행이 되었다.

크리스마스씰은 우리나라에 그보다 먼저인 1932년 캐나다선교사 셔우드 홀 박사에 의해 개발되어 보급되었었는데,

일제시대였던 당시 일제는 그를 스파이로 몰아 우리나라에서 쫓아내고만다 더불어 결핵씰발행도 중단이 되어버린것이다.


<이미지 출처 :한국 기독교 역사문화관>

문창모박사는 한국의 슈바이쳐라고 불린다

문창모(文昌模, 1907.4.23~2002.3.13)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다.

1957년 원주기독병원의 초대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이후 1964년 부터는 원주시 학성동에 개인병원으로 '문 이비인후과'를 열고 43년간 진료하였다.

환자를 우선으로 알던 그는 아침 일찍 출근하거나 등교하느라 진료시간이 여의치 않은 이들을 위해 아침 6시에 문을 열었다.

이른시간이라 간호사가 없을때에는 손수 진찰하고 약을 조제하였으며, 돈이 없으면 무료로 진찰해 주었다. 

토요일 오후엔 농가를 방문하는 순회진료를 하였다.

문창모박사는 1992년 국민당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한다. 

제 14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는데 당시 연세가 86세로 최고령 국회의원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의원일정을 마치면 원주로 돌아와 환자를 봐야 직성이 풀리셨던 분이시다. 

연세가 더하여 감에 따라 2001년 3월 31일, 의사로 걸어온 70여년의 긴 여정을 뒤로 하고 향년 95세에 은퇴를 하였으며, 

환자를 돌볼수 없는 아쉬움에 눈물을 흘리셨다, 그는 원주제일교회를 섬기며 사시다가 96세의 연세로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다. 

문창모장로는 해주시 초대시장(1945), 인천도립병원장(1946), 국립마산결핵요양소장(1947), 세브란스병원장(1949). 

대한결핵협회 사무총장(1953), 국제대학학장(1957), 원주기독병원장(1957), 14대 국회의원(1992) 등 

많은 일들을 맡아오면서도 하루도 환자보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문창모박사는 의사가 자신의 천직이며, 그 천직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정부는 그에게 국민에게 수여하는 최고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문창모장로는 자서전에서 , '천리마 꼬리에 꽉 붙은 쉬파리는 힘들이지 않고도 천리를 날 수 있었다.' 

이처럼 자신도 자기를 지켜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품에 딱 매달려 96년을 하루같이 무난하게 올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자신의 소명을 잘 알고 일생동안 실천한 문창모 장로의 삶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ㅇ게 큰 감동과 조전을 주고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 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문창모장로 기념비

문창모 박사는 "한국의 슈바이처" 로 불릴 정도로 헌신적이며 95세에 쓰러져 지칠때까지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술(仁術)'을 펴왔다.

특히 고인은 우리사회에 결핵환자가 너무 많이 발생하는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해 

1953년 결핵환자 퇴치를 위한 대한결핵협회를 조직했고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하였다.

원주기독병원(현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초대 원장을 역임했다.


나 애시덕 선교사 기념비

레어드(Esther Raird 나 애시덕) 선교사는 하동리(현 삼천 교회 터)에 

건평 100평의 2층 양옥으로 "기독 여자관" 을 지어서 원주읍교회 교인들을 상대로 

생활개선 및 유치원교육 그리고 성경교육에 힘을 쓰셨다. 

특히 기독교 여자관에서는 야갼학교와 소녀구락부 그리고 부녀자클럽을 열어 성경공부와 서구식 교육을 하여

교인들이 현대여성으로 교양을 갖추게 하였다.


모리스 선교사 기념비

26년간 선교사역을 하다가 1927년 1월 18일 소천하신 모리스(C.D.Morris) 선교사의 공을 기리는 기념비로 1928년에 세웠다.

모리스는 1900년 31살의 나이에 드류신학교를 나와 목사안수를 받고 곧 내한하여 영변, 평양, 해주지역에서 선교를 하였고, 

1916년 부터는 원주와 강릉지방에서 주로 선교하다가 1927년 소천하였다. 

그는 늘 한국 사람을 만나면"선한 사람은 결코 죽지 않는다!" 고 하시며 전도를 하였다 한다.








원주제일교회

강원도 원주시 일산동 114

033) 742-2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