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도보 여행/역사길

[하마정下馬停] 이곳을 지날때에는 모두 말에서 내려야 하는곳

워크뷰 2011. 1. 28. 07:00

하마비란 계급의 상하를 막론하고 그곳을 지나갈 때에는 "말에서 내려라"(下馬)라는 뜻을 새긴 네모난 돌기둥(비석) 이다.












 
이 고을에 하마비가 세워진것은 조선초 태종때 부터라고 하나. 직접 하마의 예를 실천하게 된 동기는 따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구전 설화-1
 고려 때 정문도 공 묘소가 화지산에 있었기 때문에 분묘(墳墓) 입구인 이 곳에서 경의를 표하고 가라는 하마비를 세우게 되었고 하마정(下馬停)이라고 하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구전 설화-2
조선 중종때 영의정 정광필[동래정씨]이 이곳 정문도 선조 묘소가 있는 화지산을 찾게 되었다.
이때 동래 부사가 마중을 가게 되었는데 .....이때 위세가 당당한 영의정 정광필이 근방에 자기 선조의 묘소[정문도]가 있는지라...이처럼 신성한곳에 말굽소리가 요란해서 되겠는가 ? 모두 말에서 내려 조용히 예의를 가춰야 되지 않겠는가 ?
라고 지시를 함으로서 실천이 되었다고 한다.

하마정에 얽힌 전설
임진왜란 당시 왜장이 하마정 앞을 말을 타고 지나려 하자 말이 갑자기 요동쳐 왜장이 말에서 떨어졌다. 다시 말을 타려하자 또 말이 요동쳤다. 통여관에게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니 이 곳은 정문도 공 묘소가 있는 곳으로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가야 한다고 설명했더니 왜장도 예의를 갖추고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고 한다.

동래정씨 가훈
동래정씨는 그 유훈으로 내려오는 가훈도 남다르다.
동래정씨 가훈은
"남과 적을 삼지 않는다" 이다 . 조선시대 그토록 극심한 사화와 당쟁과 세도정치 속에서도 벼슬길이 끊기지 않은것은 그 가훈을 잘 지켰기 때문이었을까 ?
지금도 양정동 화지산 기슭에 사당 정묘사는 시민공원으로 개방하여 누구나 찾을 수 있으니 부러웁기 그지 없다.

 

원래 부산진구 양정동과 연제구 거제동 경계지역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아니라 하마정(下馬停)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세부지도상에는 하마정 사거리는 분명 양정1동에 들어가지만 옛날지상의 표지가 많지 않은 시대는 하마정 일대라 하면 그 범위는 훨씬 넓어진다. 하마정이란 말(馬)에서 사람이 내리는 정거장이란 뜻이다.

이 하마정은 오늘날의 동해남부선 철로의 거제역에서 간선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린 굴다리쯤 자리가 된다.
이곳은 동래정씨 시조 정문도(鄭文道)의 묘소가 있는 화지산(和池山) 입구이니 이곳을 방문하거나 지나는 사람은 이곳에서 말을 내려 동래정씨 시조에게 배례하고 지나가는 곳이라는 표지이다. 동래정씨 가문에 대해서는 [연제구를 빛낸 인물]에서 자세하게 언급하고있는 바와 같이 정문도의 후손 동래정씨 가문의 정목(鄭穆)·정항(鄭沆)·정서(鄭敍) 3대가 고려 15대 숙종 16대 예종 17대 인종 18대 의종 무렵까지 관직에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고 정서의 아내와 17대 인종왕비간은 친자매여서 정서(鄭敍)와 인종은 동서간이 되었다. 이 사실은 특히 고려 인종(1123∼1146) 이후 조선시대까지도 동래정씨 가문의 후손들과 새로 부임하는 지방관들의 참배지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조선조에 정승벼슬을 지낸 인물을 많이 배출한 순위를 보면 첫째 전주 이씨 22명, 둘째 안동 김씨 19명, 셋째 동래 정씨 17명의 순이다. 그러나 왕족인 전주 이씨와 외척으로 득세한 안동 김씨를 제외하면 동래 정씨는 정승 배출의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동래 정씨가 이처럼 현달하게 된 것을 풍수지리적으로 해석하면 두 개의 명당 때문이다. 그 하나는 부산 동래에 있는 동래 정씨 2세조 정문도(鄭文道)의 묘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이곳 지보면에 있는 정사(鄭賜)의 묘가 한국 8대 명당에 속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가문의 빛낸 정씨 후손들의 출세가 이정도였다보니 세인들의 숭상을 받았다고 여겨지며 그 시대의 사람들로서는 정묘 앞을 지날때면 경의를 표시 할만하지 않은가.

그래서 정묘가 있는 그 앞길을 지날 때면 동래 정씨 집안이건 집안이 아니건 정묘에 예를 표하기 위하여 말에서 내렸다. 하마정이란 이름이 여기서 유래되어 생겨났다고 한다. 이 하마정은 고려 때 이미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때 생긴 하마비보다 앞서게 된다.
그러다보니 단출하고 작은 크기의 하마비 구조로 되여있어 조선시대에 설치된 위 사진의 하마비와는 격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하마정은 오늘날에도 현지지명으로 남아있으나 그 본래의 의미가 점차 잊혀져 가고 있다.
 
끝으로 하마(下馬)에서 나온 말로 개각이나 요직의 개편이 있을 때마다 쓰는 하마평(下馬評)이란 말의 유래는 이렇다.  옛날의 교통수단인 기마나 말에서 주인을 내려준 하인들은 주인을 기다리는 동안 그들끼리 잡담을 나누게 되었고 별의별 얘기가 다 나왔다. 그들의 주인은 고급 관리가 대부분인지라 이야기의 중심도 자연히 출세 진급 따위의 "자리"에 대해 런저런 대화를 하는 것에서 나온 말이 하마평(下馬評)이다. 앞으로 대선 후 고위관직에 대한 숱한 하마평이 쏟아지리본다.


[참고자료: 제 3장 연제구를 빛낸 인물]
출처-->http://blog.joinsmsn.com/eskang/87810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