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도보 여행/역사길

[증산공원] 사라져 버린 이름 부산진성

워크뷰 2011. 3. 30. 04:56



경남 앙산시에 증산왜성을 다녀 온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부산에도 증산왜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날을 잡아 오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지금은 명칭이 증산체육공원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시내버스 38번을 타고 범일초등학교앞에서 하차한후 증산공원을 향하여 걸어갑니다


범일초등학교 좌측답벼락을 따라 걸어 올라갑니다


혹시나 하여 다시 손안의 네비를 꺼내듭니다

증산공원의 입구삼거리입니다


청년회 신입회원을 모집하는군요


범일배수지를 지나갑니다


동구도서관이 나타나면 이곳이 입구입니다


동구도서관입구와 같이 증산공원의 입구가 있습니다


이용안내도를 잠시 쳐다보고 걷습니다
안내도는 자신이 직접 걸어보고 난뒤에 다시 봐야 이해가 되더군요^^






게이트볼장이 나타납니다


게이트볼장을 지나서 오니 증산공원이라 쓰인 안내석이 있습니다






왜성의 흔적이 보입니다


운동시설및 맨발걷기코스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돌기둥이 하나 서있는데 어떤 용도일까요


묘 뒤편으로 천수각이 보입니다


천수각 아래 묘비 - 正三品 通政大夫 扶寧金公




앗 냐옹이 발견


운동하시며 지나가시는 분이 애기하네요
항상 이시간에 먹이를 가져다 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것이라고 하네요


공원옆 아파트인데 아주 오래되었나 봅니다




계단울타리의 와이어를 이용하여 무뉘를 만들었네요


여긴 정상부인데 넓은 운동장과 농구코트가 설치되어 있네요






운동장을 내려오니 고양이가 있던자리로 내려오게 되는군요
제가 운동장에 올라갔다 내려오는사이에 고양이먹이를 누군가 주고 갔네요
열심히 먹고있는 고양이의 모습입니다


증산둘레길이라는 표지가 있습니다
길이가 아주 짧은 350M이네요






각 성마다 항상 있는 대나무숲
이유는 화살을 만들기 위해서랍니다












증산둘레길 350m의 끝입니다


성을 내려오니 조금전 보았던 아파트의 정문이 보입니다


내려왔던 계단으로 다시 올라갑니다


멋진 족구장시설이 되어 있습니다




입구로 다시 돌아 오니 큰 화장실이 저를 반깁니다

네이버 항공지도로 바로보기-->http://map.naver.com/

증산공원의 역사 

1490년(성종21) 부산진성 완공 
임진왜란 당시 첫 격전인 부산진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유명합니다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조선원정군 제1진 1만 8,700여명 부산포에 등장
1592년 4월 14일 새벽에 정발장군을 포함한 우리측 병력 600명과의 부산진성전투시작 
                         일본군 제1군의 대장인 고니시는 전병력으로 성을 포위한 다음,
                         부산진성에 글을 보내어 "길을 빌려달라"는 요구를 하였다. 그러나 정발은
                         이 를 묵살하고 성을 사수할 결의를 분명히 하였다. 일본군은 부산진성을
                         물샐틈 없이 포위하고 대규모 공격을 개시하였다. 일본군 조총부대가
                         부산진성 서문 밖 고지에서 성안에 사격을 퍼부어 성벽 위의 조선
                         군민들이 고개를 들지 못하는 틈을 타서 성벽을 타고 넘어 들어갔다.
                          이와 같이 하여 성안에서는 치열한 백병전이 전개되었고,
                         부산진성의 수장인 정발은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남은 군민들도 창칼이 부러지고 화살과 돌이 바닥날 때까지 선전
                         분투하였으나, 마침내 이날을 넘기지 못하고 부산진성과 더불어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초전에서 부산진성을 점령한 고니시군은 승전의 여세를
                         휘몰아 인접지역인 서평포와 다대포에 공격을 가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이 때 진주에 있던 경상감사 김수는 부산진성 함락 소식을 듣고,
                         도내 각 군현의 수령들에게 "밀양에 군사를 집결 시킬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 명령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따라서 각 군현의 병력도
                         모이지 않았다. - 이것이 당시의 부산진성 전투의 대략이다.


1593년 5월 임진왜란 이듬해 2월 왜장 모오리테루모토등이 부산진성을 함락한 후
                 부산진성의 성축을 허물어 석재로 이용하여 축성(築城)한 것
                  임진왜란당시의 부산진성은 바닷물이 남문까지 들어올정도로 튼튼하게 지었음
                  그러나 증산왜성의 축성으로 지금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짐

                  일제치하에선 좌천동 공동묘지로 사용 되었음
1960년 전후 증산공원에 동물원이 건설됨
                   코끼리가 동물원이 완성되기도 전에 먼저 들어옴
                   그러나 바닷바람에 얼마 못가 코끼리가 죽고 맙니다
                   이후 동물원건설업자가 파산을 하게 되고
                   이 곳에 전후 집이 없던 피난민들이 들어와 살게 됩니다
                   곰우리에 사람들이 들어가 살게 되니 참 이상한 모양이었답니다
                   이후 모두 새로운 터전을 찾아 이사를 갔지요

1982년 동구청에서 체육공원으로 조성하여 관리하고 있다
           좌천동에 있는 정공단의 뒷산으로 증산이라 하는 이유는
           시루(甑)와 같이 생긴 재성(倭城 )이 있으므로 해서 붙여진 이름


 정발장군

부산첨사 정발(鄭發 1553~1592) 자는 자고(子固), 본관은 경주(慶州)
1553년(명종 8년) 경기도 연천 출생 25세(선조 10년) 무과급제 선전관에 등용
선조 24년 절충장군으로 부산첨사에 배명
1592년 4월 14일 장군은 검은 갑옷을 입고 노도와 같이 밀어닥친 수많은 왜군을 맞아
분전을 거듭하다 무인답게 장렬히 순절하였다.

성중 군민은 장군의 충의에 격발되어 너나 할 것 없이 죽음으로써 항전하다
모두 죽어갔다. 소수 군민의 항전이었으나, 매우 굳세어
성을 함락한 왜군은 그 분풀이로 군신(軍神)의 혈제(血祭)라 하여
개, 고양이까지도 죽였다.
난 후 잔혹한 왜인들은 [우리는 부산에서 크게 좌절되었다],
[흑의장군이 가장 두려웠다]고 말할 정도로
 첫 싸움에서 장렬한 전투를 치루었다.
묘소는 경기도 마전에 있다.


출처-->부산 충렬사


 임진왜란의 첫 격전지 부산진성의 옜자료 부산진순절도(釜山鎭殉節圖) 

부산진순절도 해설 동영상 바로 보러가기-->서울문화재 홈페이지

이 그림은 선조(宣祖)25년(1592) 4월 13일과 14일 양일간에 걸쳐 부산진(釜山鎭)에서의 왜군(倭軍)과의 처절한 공방전(攻防戰)을 보여준 것이다. 한 폭(幅)의 그림이긴 하나 처절한 양상에 새삼 놀라움을 금하기 어려운 절박한 상황을 잘 표현하였다.

부산진(釜山鎭)의 진성(鎭城)은 지금 수정초등학교(水晶初等學校) 뒤에 위치하여 있었으므로, 당시에는 바로 해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경(寫景)을 곁들인 이 그림은 성곽을 위쪽으로 밀어 올리고 해안선을 대각(對角)으로 끊어 그 아래를 즐비하게 밀어닥친 대형 왜선(倭船)으로 빈틈없이 채워 그 뒤의 바다도 왜선으로 뒤덮여 있음을 암시하였다.

선중(船中)의 왜군(倭軍)과 접안(接岸) 상륙중인 왜군, 공성중(攻城中)인 왜군 등 끝이 없는 듯한 전력(戰力) 앞에 절의금도(節義襟度)로써 침착하게 수성(守成)하는 성내의 소수 아군(我軍)들이 엄청난 대비(對比)를 이룬다. 성하(城下)는 도검난무(刀劍亂舞)하는 많은 왜병으로 뒤덮여 있고 왜병이 아군보다 왜소(倭小)하게 그려진 것은 성내의 소수에 대한 다수를 표현하는 데 효과적인 기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순절도(殉節圖)는 동협부순절도(東莢府殉節圖)와 함께 근년까지 (동협(東莢) 안락서원(安樂書院))에 봉안(奉安)되었던 것이며, 영조(英祖)36년(1760)에 개모(改摹)된 것이다. 원래 광주시립박물관(光州市立博物館)에 있던 당포전양승첩도(唐浦前洋勝捷圖)와 함께 드문 임란전도(壬亂戰圖)임과 동시에 희유(稀有)의 교전도(交戰圖)이다. 숙종(肅宗)35년(1709)에 그려진 것으로 전하는 원본의 소전여부(所傳與否)는 분명하지 않다.

민족의 수난과 국기(國基)의 수호라는 엄청난 체험을 재현하여 모범을 보여 주는 그림으로서 민족정기의 훈향(薰香)에 접할 수 있는 드문 유작(遺作)이다.

출처--> 문화재청

포르투갈 선교사의 임진왜란 부산진성 전투기록   

"고니시는 20,000명의 전투원과 함꼐 총 643척의 크고 작은 배에 편승하여 쓰시마섬을 출발하였다. 특히 부산성이라?불리는 요새는 일본인들이 들이닥칠 첫 관문인 관계로 그곳에는 600여명의 병사가 있었으며, 그외에도 마을에서 모은 평민들이 있었다.

 

 연도에는 모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진지 앞에 끝이 뾰족한 쇠(마름쇠)들을 뿌려 놓았으며, 요새 내부에는 구리로 만든 작은 포들이 2,000개나 배치되었다. 그 중 어떤 것들은 작은 포환을 발사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것들은 크기가 두뼘 정도되는 화살촉을 발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코라이 병사들은 모두가 매우 견고한 가죽으로 만든 흉감을 몸에 두르고 무장을 하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화살을 막아내기 위해 철모를 쓰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궁수들이 많고 또한 미늘창을 쓰는 병사도 있었다.

 

마침내 고니시는 음력 4월 12일에 요새 밖의 모든 마을들을 일차적으로 불지를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나서 요새의 대장 앞으로 나아가 항복할 것을 권하고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는 내용의 서찰을 보냈다. 이 서한을 받은 대장은 이를 비웃으며 국왕에게 보고하여 허락을 한다면 항복하겠노라고 회답하였다. 코라이 병사들은 훌륭한 무사들로서 왕에 대한 충절이 넘쳐 흘러 최후의 한 사람까지 용감히 싸웠다.

 

수비대장이 앞장서서 처음으로 전사하였으며 아무도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가문있는 코라이 여인들은 정결하고, 수절하는 것으로 명성이 나 있었다. 한편 양반집 남녀 자제들은 용모가 반듯하고 교육도 받은 자들인데, 다리를 저는 자나 입을 꼬아 비둘어 지도록 위장하였다. 그러나 일본군들은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들을 포로로도 살려 두려 하지 않았다."



당시 전투는 묘시(5~7시)에서 사시(10~12시)까지 였고, 일본군은 부산진성 점령후 남자, 여자, 개 그리고 고양이 할 것없이 모두 살해했다고 "吉野日記"는 적고 있소.

[출처] [펌]포르투갈 선교사의 임진왜란 부산진성 전투기록 |작성자 미르별

팬저의 국방여행 바로가기-->http://panzercho.egloos.com/10616446

다음지도로 보기-->http://dmaps.kr/2aye

지도를 보면 지금의 부산 5부두 주변이 모두 바다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바다였기 때문에 왜구가 부산진성 남문까지 배를 끌고와서 침략을 한것이지요
18,700명 VS 600명의 전투라 정말 죽기로 마음먹고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한 정발장군과
부산진성민에게 애도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