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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김인후 신도비 전라남도 기념물 제219호 그리고 통곡단과 난산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41호

워크뷰 2019. 11. 29. 15:14

장성 김인후 신도비 전라남도 기념물 제219호 그리고 통곡단과 난산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41호


필암서원에서 황룡면 방향으로 가다보면 김인후 신도비가 있습니다.

묘역 입구에 두개의 비가 서있는데요
하나는 비각안에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울타리만 쳐있는 상태로 있습니다.


사연인즉 비각안에 있는 신도비에 빠진 내용이 있어서 추가로 비를 세우다 보니 두 개의 비가 있게 된 이유였습니다.


추가된 비는 신도비 건립후 110여 년이 지난 1796년(정조 20년) 정조대왕이 하교하신 문묘 종사, 문정으로의 개시, 증직, 부조명 등의 
추가 사적이 등재되지 않아, 1979년 정월 본손과 유림들의 총의를 거쳐 추기 신도비를 건립키로 결의하였답니다.


1980년 봄 추기비문을 본손 담운 김상일이 안동인 화산 권용현에게 청문하여 
그해 늦여름 완성을 보아 1982년 추기 신도비를 건립하였습니다.


비각안에 있는 신도비를 바라봅니다.
이 신도비는 하서 김인후(1510~1560) 선생을 기리기 위해 1742년(영조 18)에 세운 신도비로
비의 글은 1682년에 우암 송시열이 10년을 걸쳐 지은 명문장입니다.


본문은 중추부사 이재가 쓰고,
전서는 대사헌 김진상이 써서 원당상 묘소 아래에 세웠습니다.


전·후면에 각 19행, 양 측면에 각 8행씩 모두 54행(1행 54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신도비문에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모두 갖춘 
하서 김선생을 태어나게 했고, 태산북두와 같은 백세의 스승'이라 쓰여있습니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비신을 세우고 비문을 올렸으며
그 위에 머릿돌을 올린 형태입니다.


김인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동국 18현 가운데 1인인 입니다.
본관은 울산, 자는 후지, 호는 하서 또는 담재이다. 모재 김안국 미암 유희춘, 신재 최산두에게 배웠고 
154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 승문원 부정자에 등용된 이래
 홍문관 정자, 옥과현감을 지냈고,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두루 갖춘 인물로 널리 기림을 받았습니다. 


시호는 문정이며 1796년에 문묘에 배향되었습니다, 
그리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에 추증되었습니다. 
"주역관상편"과 "서명사천도"를 저술했고 문집으로 "하서전집"이 있습니다.
 장성 필암서원(사적 제242호) 등에 배향되었습니다.


다시 길을 나서 난산교를 지나면 

자그마한 교회옆으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습니다.


길을 따라가다보면 잘 정돈된 도로 위에 비각안에 있는 난산비를 만날 수 있으며


난산비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통곡단이 나옵니다. 



하서 선생은 인종이 승하하신 7월 1일이면 이곳 난산에 엎드려 종일 통곡하였다고 합니다.


하서의 이같은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단이 통곡단이며
그 사실을 새겨 세운 비가 난산비입니다. 

장성 김인후 난산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41호 


1793년 무렵에 석재 윤행림이 비문을 지었으나 비를 세우지 못하였는데,
1843년 그의 아들 교리 윤정현이 추기를 쓰고 광주 목사 조철영이 비를 세웠습니다.


한 나라의 충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장성 여행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