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경상북도

[성류굴] 경북 울진

워크뷰 2011. 8. 31. 05:00






입장료는 어른 3,000원 입니다. 








안전모함이 있네요^^
그냥 지나쳤습니다
나중에 후회를 하였답니다
여러분들은 안전모 착용하시고 들어가세요^^

















안전모를 착용해야 하는 이유^^
여기서 발견합니다!!!

성류굴의 원래 이름은 선유굴 이었답니다, 
신선이 노닐 만큼 주변경관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굴 앞의 사찰에 있던 불상을 이 굴속으로 피난시키며
여기서 성불이 유한 굴 이라
하여 성류굴 이라 부르게 되었답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인근 주민들이 왜적을 피해 성류굴로 피난했는데,
이를 탐지한 왜병들이
동굴입구를 막아버려 모두 굶어 죽어서 그 뒤 동굴도처에서 사람의 뼈가 수도 없이 발견되었다는 슬픈 역사가 깃들여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못은 굴 외부의 왕피천과 상통되어 있어 물고기가 살고 있습니다. 
내부온도는 1년 내내 섭씨 15∼17도를 유지하므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네요.

성류굴을 나노니 무지 더웠는데 온도차가 있더군요^^
















이 굴이 생성된 시기는 약2억5천만년전으로 추정되며,
굴을 한바퀴 돌아나오는 데는 넉넉잡아 1시간 30분 정도.....
길이는 약 330미터 정도입니다




울진 성류굴
  • 종별 :천연기념물
  • 지정번호 :천연기념물155호
  • 지정일시 :1963. 5. 7
  • 소재지 :근남면 구산리 산30
  • 시대 :고생대(2억 5천만년 전)
  • 재료 :석회
 

이 동굴은 선유산 서북쪽에 위치하여 입구(해발 약20m)에 서 동북쪽으로 발달해 있으며,
주굴의 길이는 약 330m, 지 굴의 길이는 약 540m로 총연장은 약 870m로
이중 약270m를 개방하고 있다.
성류굴은 전체적으로 수평동굴이고 동굴 내 여러 개의 다 양한 크기의 호수가 형성되어 있고, 왕피천과 연결되어 있 다. 이 굴은 석회암이 순수한 물에 녹아 생긴 것이 아니라,
지하수에 녹아있는 산(酸)에 의하여 용식작용이 일어난 석회동굴(石灰洞窟)로
생성시기는 2억 5천만년쯤으로 추정하고 있다.
굴 내에는 종유석, 석순, 석주, 베이컨시트와 동굴진주, 석화, 동굴산호, 동굴방패 등
 다양한 생성물로 인해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고 있어 ‘지하금강’이라고 불린다.
또 지금까지 발견된 동굴동물로는 박쥐, 곤충류 등 10강 24목 43과 49속 54종이
서식하고 있다. 한편, 이 굴과 관련된 역사적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보천은 늘 신령한 계곡의 물을 떠서 마셨다. 만년에 육신이 공중으로 날아 유사강 밖에 이르러 울진국 장천굴에 머물렀다. (보천은) 아침저녁으로 수구다라니 외우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굴의 신이 모습을 드러내어 말하기를 “제가 굴의 신이 된지 2천년이 되었지만, 오늘에야 처음으로 수구다라니를 들었읍니다. 청컨대 보살계를 받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미 (보살계를) 받은 다음날 굴은 또한 형체도 없어졌다. 보천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21일을 머물다가 오대산 신성굴로 돌아와서 다시 50년간 수도를 하였다.”〔『三國遺事』卷3 塔像4 臺山五萬眞身條〕

② 보질도태자는 언제나 계곡의 신령한 물을 마셨는데, 육신이 공중으로 올라가 유사강에 이르러 울진대국의 장천굴에 들어가 도를 닦았다. (그후) 오대산 신성굴에 돌아와 50년 동안 도를 닦았다.”〔『三國遺事』卷3 塔像4 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條〕

위 사료들은 울진의 장천굴(지금의 성류굴)에 2천년 동안이나 굴신(窟神)이 있었는데, 보천태자(신라 신문왕의 아들)에 의해 굴신이 불교에 귀의하게 되는 내용이다. 즉, 이때쯤 울진지역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파되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천태자가 울진에 오는 시기는 역사적 배경으로 보아 700년을 전후한 시기로 판단된다. 지금까지 이 굴을 장천굴(掌天窟), 탱천굴(撑天窟), 선유굴(仙遊窟), 성류굴(聖留窟) 등 다양하게 불러왔다. 그러나 이 굴은 ‘장천굴’로서 『삼국유사』에 처음 나오며, 이후 이곡(李穀 ; 1298~1351)의 「관동유기(關東遊記)」에 ‘성류굴’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에는 ‘성류굴’이라 하면서도 옛날에는 ‘탱천굴’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로보아 이 동굴의 최초 이름은 ‘장천굴’로 통일신라때(8세기 전후)부터 불리어 왔으며, 늦어도 고려시대 말(14세기 초)부터는 ‘성류굴’로 불린 것 같다. 그리고 ‘탱천굴’은 한자로 보아 장천굴의 장(掌)자를 탱(撑)자로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또 ‘선유굴’은 경치가 우아하여 신선(仙)들이 놀던(遊) 곳이라 하여 불리어졌으며, ‘성류굴’은 임진왜란때 왜병들에 의해 부근에 있던 성류사란 절이 소실되자 그 절의 불상을 이곳으로 옮겼다는데 유래되어 성불(聖佛)이 머문(留) 곳이라는 뜻이라 하나, 이미 고려 말에 성류굴이라는 명칭이 나오므로 신빙성이 없다. 그리고 임진왜란때 주민 500여명이 이 굴로 피신하였는데, 왜병이 입구를 막아 굶어죽었다는 슬픈 전설도 전해온다. 특히 2007년 한국동굴연구소의 조사에서 국내최초로 수중구간이 약 85m발견되었는데, 대형의 종유석, 석순 등의 동굴생성물이 물속에 잠겨있으며, 이는 과거 빙하기 동안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그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또 진동굴성 쥐며느리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되기도 하였으며, 성류굴주변의 암석이 하부 고생대 오르도비스기(약 4억 6천만년~4억 7천만년 전) 동안에 퇴적된 것이라는 사실도 처음으로 밝혀졌다.

출처 울진군청 홈페이지-->http://tour.uljin.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