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 무산사 주세붕 선생 영정을 모신 곳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3호
경남 함안 가볼만한곳 주세붕 선생 영정을 모신 무산사(武山祠)
경남 함안군 칠서면 무릉리에 가면 조선시대의 유명한 유학자인 주세붕(1495∼1544) 선생의 영정과 유품을 모신 곳 무산사가 있습니다. 주세붕선생은 중종 38년(1543)에 백운동 서원을 세워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으며,
주세붕을 추모하는 서원은 1591년(선조 24) 동림 서원(桐林書院)으로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습니다. 1660년(현종 1)에 본향 남고(南皐)에 중건되었다가 1676년(숙종 2)에 덕연 서원(德淵書院)이란 사액을 받았습니다.
무산사 외삼문
고종(재위 1863∼1907) 때 흥선대원군에 의해 서원이 철폐되자 영정을 종가 사당으로 옮겼다가, 1919년 사림의 공론에 따라 사당 곁에 유림들이 다시 무산서원(武山書堂)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불타버리고, 현재의 무산서원은 그 후에 세운 것입니다. 서원은 요즘 말로 하면 사학 교육단체입니다.
내삼문인 심원문
무산사 내에 있는 무산서당은 앞면 5칸·옆면 2칸의 1층 건물이며,
지붕은 옆모습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입니다. 중앙 2칸의 대청을 사이에 두고 양옆에 각각 2칸과 1칸의 방을 꾸며 전형적인 서당의 공간구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앙의 건물에는 일각문이 있으며 문은 霽月門이고, 이 일각문을 지나면 주세붕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光風閣이 있습니다. 광풍각에는 주세붕 선생의 영정이 있다가 지금은 청풍각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장판각에는 '무릉잡고', '수구집', '귀봉집', 책판 352매가 보관되어 있다가 지금은 청덕각 사료 전시관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습니다,
소수서원 전경
주세붕 선생의 업적을 보면 조선조 11대 중종 38(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을 건립한 것이 서원의 시초이며,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명종 5(1550) 년 이황이 군수로 부임하자 임금에게 아뢰어 노비, 전결 및 소수서원이라는 액서를 받아 이름을 고치니 이것이 사액서원의 시초가 되었고, 임금은 이 밖에도 대제학 신광한에게 명하여 기(記)를 만들게 하고 사서, 오경, 성리대전 등의 책도 내려 주었읍니다.
그 후 중종 39(1544) 년에 문정공 안축, 문경공 안보, 인조 11(1633) 년에는 주세붕을 추배. 고종 8(1871) 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계속 유지되었으며 현재까지 전하여 집니다.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에 의해 인삼의 재배기술이 전국적으로 퍼졌는데, 우리나라의 인삼을 알리고 농업기술을 혁신한 인물이 주세붕 선생님입니다. 중국의서인 '신농본초강목(神農本草綱目)'엔 고려인삼을 '상약 중 상약'으로 칭하고 있습니다.
무산사 입구에 있는 오륜가
주세붕은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인 유교 윤리에 대해 많은 애착을 가지고 지방 고을 수령으로 나가 백성들을 다스릴 때 기본으로 삼았는데, 어버님 날 낳으시고 주세붕 어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유교 윤리의 다섯 가지 기본항목인 오륜을 일반에게 널리 보급시키기 위해 노래로 풀이한 것입니다.
오륜가(五倫歌)
주세붕
사람 사람마다 이 말씀 들으시오
이 말씀 아니면 사람이요 사람 아니니
이 말씀 잊지 마오 배우고야 말으리라
아버님 날 나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부모 옷 아니시면 내 몸이 없으렸다
이덕을 갚으려 하니 하늘같이 끝이 없네
종과 항것과를 그 누가 만들었나
벌과 개미들이 이 뜻을 먼저 아네
한마음에 두 뜻 없이 속이지나 마시오
지아비 밭 갈러간 데 밥고리 이고가
밥상을 들여오되 눈썹에 마춥니다
진실로 고마우시니 손님이나 다르실까
늙은이는 부모같고 어른은 형같으니
이같은데 不恭하면 어디가 다를고
나로서는 맞이하거든 절하고야 말것이다
해 설
모든 사람은 이 말씀 들으시오.
이 말씀이 아니면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닌 것이니
이 말씀 잊지 않고 배우 고야 말일입니다.
아버님이 나를 낳으시고 어머님은 나를 기르시니
부모님이 아니셨더라면 이 몸이 없었을 것이다.
이 덕을 갚고자 하나 하늘같이 끝이 없구나.
종과 상전의 구별을 누가 만들어 내었는가.
벌과 개미들이 이 뜻을 먼저 아는구나.
두 뜻을 가지는 일 없도록 속이지나 마십시오.
편이 밭 갈러 간 곳에 밥 담은 광주리를이고 가서,
밥상을 들여오되 지아비의 눈썹 높이까지 들어 바칩니다.
진실로 고마우신 분이시니 삼가고 조심스러운 손님 대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늙은이는 부모 같고 어른은 형과 같으니
이와 같은데 공손하지 않으면 짐승과 어디가 다르겠는가.
나로서는 노인과 어른을 맞이하게 되면야 절을 하며 받들어 모실 것이다.
주세붕은 그 자신이 효자였습니다. 7세때 어머니가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머리에 이가 있는 것을 보고 자기 머리에 참기름을 바르고 머리를 마주대어 이를 옮겨 제거하니 사람들이 그 현명함에 감탄하여 효자라고 칭찬하였다고 합니다.
청덕각에는 무릉잡고(武陵雜槁) 책판 및 수구집(守口集), 귀붕집 책판(유형문화재 제173호) 352매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무릉잡고는 주세붕 선생 시문집으로 본집 8권, 별집 8권, 도합 16권 9책이며, 수구집은 주세붕의 손자 주맹헌(주맹헌, 1617~1703)의 시문집으로 4권 2책이며, 구봉집은 주세붕의 아들 주박의 시문을 모은 것으로 2권 1책입니다.
신재 주세붕선생의 영정
신재 주세붕선생의 약사 그리고 덕연서원 유래와 무산서당.
소수서원을 휘돌아가는 죽계계곡의 개울가에 위치한 경(敬)자 바위
주세붕 선생은 경(敬)이라는 글자 한자를 바위에 새겨 남겼는데, 경(敬)자는 선비의 덕목을 나타낸 글자로 공경과 근신의 자세로 학문에 집중한다는 의미입니다. 더불어 안향을 공경하고 기리는 마음을 후대에 전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경(敬)자 위의 백운동(白雲洞)은 소수서원의 본래 이름입니다.
주세붕(周世鵬) 선생 경(敬)정신 바위를 이곳 무산사에도 있습니다.
주세붕 선생은 30년간 조정에 나와 벼슬이 재상의 반열에 이르렀으나, 의복이 선비와 같았고 밥상에 고기 반찬을 한가지 이상 놓지 않았으며, 마굿간에는 좋은말이 없었으며, 세상을 떠났을 때 집안에 남은 곡식이 한가마도 없었다고 전합니다.
무산사 앞쪽에 무릉동천(武陵洞天) 문화지향(文華之鄕)이라 새겨진 비석 그리고 생가지 표지석이 있습니다.
현 함안군 칠서면의 무릉리에 있는 무산사는 주세붕 선생이 중국 무릉도원에서 따온 이름으로, 사람들이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상향(理想鄕)의 마을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조선 중종 때 학자 주세붕이 지은 것이라고 전해옵니다.
무산사옆에는 수령이 500년된 은행나무가 우뚝 서 있습니다. 나무둘레가 5.5m이니 대단합니다.
그리고 은행나무옆에는 수령이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서있습니다. 수고가 18m, 나무둘레가 6.0m입니다.
이 두나무는 현재 보호수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무산사
전화번호 : 055-580-2301
경남 함안군 칠서면 무릉리 5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