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70주년 기억을 넘어 함께 백마고지 전적지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매년 6월이면 우리는 기억합니다. 지난 70년 전 일어났었던 한국전쟁의 처참함을 기억합니다.
오늘은 6.25 전쟁 70주년을 맞아 중요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강원도 철원 백마고지로 왔습니다.
백마고지로 이동하는 버스에서 보이는 백마고지의 전승탑은 가슴을 찡하게 합니다.
백마고지?
백마고지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 어원은 이 고지가 피아간의 격전으로 인한 폭탄의 피해로
하늘에서 보면 마치 백마가 누워있는 형상처럼 보여 백마고지라 이름하게 되었답니다.
백마고지는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북서쪽으로 약 12㎞ 지점에 있는 해발 395m의 고지로서 군사적 관례에 따라 395 고지라고도 합니다.
1951년 7월 정전회담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정전협정이 체결되는 시점의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삼기로 정하자 한국·유엔군과 북한·중공군 양측은 조금이라도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투를 치르게 됩니다.
백마고지는 중부 전선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철의 삼각지대(철원·김화·평강)'의 하나인 철원평야와
서울을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당시 김종오 소장이 지휘하는 국군 제9사단이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은 백마고지 일대에 2,000여 발의 포탄을 투하하며 공격을 시작하였습니다.
중공군은 제38군 예하의 제112·113·114사단의 약 4만 5,000명의 병사를 동원하였으며,
국군은 제9사단 예하의 제28·29·30연대를 비롯하여 경장비 제51연대, 53 전차중대, 제1포병단 등의 국군과 제5공군, 제73전차대대, 제49·제213·955 포병대대 등의 미군이 맞서 싸웠습니다.
10월 6일에서 10월 15일까지 열흘간 24차례나 주인이 바뀔 정도로 혈전을 치른 끝에 제9사단이 중공군을 격퇴하고 승리하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21만 9,954발의 포탄을, 중공군은 5만 5,000발의 포탄을 발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중공군은 1만여 명이 사상자 또는 포로가 되었고 제38군은 막대한 타격을 입고, 후방으로 물러났습니다.
제9사단도 3,4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이 전투의 승리로 백마부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의 대승으로 휴전을 앞두고 군사적 요지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유엔군은 정전회담에서 계속 유리한 입장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 전투를 기념하여 백마고지 정상에 기념관과 전적비, 호국영령 충혼비가 건립되어 있으며, 해마다 10월 16일을
전승기념일로 삼아 민·관·군 합동 위령제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행사장 입구에는 코로나 19를 예방하기 위하여 소독터널과 손소독제를 준비하였으며
의료진 부스도 가동중인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식전공연으로 팝페라 그룹 '지브로'의 멋진 공연이 펼쳐졌는데 가슴이 숙연하여옵니다.
그리고 국민의례를 진행하였으며 유공자 소개 및 표창의 순서가 진행되었습니다.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선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 자유대한민국이 있는것입니다.
다시 한번 순국선열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묵념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