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대포에 가면 몰운도라는 섬이 있습니다
지금은 낙동강에서 쌓인 모래로 인하여 육지화가 되어 버렸는데 

다대포횟집앞의 풍경입니다


일출사진을 많이 찍는 곳이랍니다
출처 :사하구청(http://tour.saha.go.kr)


저기 보이는 몰운대의 왼쪽끝 섬과 마주 보고있는 곳이  화손대입니다


자다 일어난 강아지^^


곤히 자고 있는 강아지^^


어느 횟집의 담벼락입니다


몰운대 표지석






요즘 웬만한 곳은 다 금연구역이지요.




담벼락에 붙어있는 이순신장군 해전 안내도


조금 걸으면 안내표지판이 나오는데 관리사무소 방향으로 가야 다대포객사가 나옵니다


숲이 울창합니다


곳곳에 이런 휴식장소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浩蕩風濤千萬里
白雲天半沒孤臺
扶桑曉日車輪赤
常見仙人賀鶴來

호탕한 바람과 파도
천리요 만리로 이어졌는데
하늘가 몰운대는 흰구름에 묻혔네
새벽바다 돋는 해는 붉은 수레바퀴
언제나 학을 타고 신선이 온다.





지하수 음수대를 지나면 다대포객사가 나옵니다




 객사는 고려·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관사 또는 객관이라고도 한다.

객사는 고려 전기부터 있었으며 외국 사신이 방문했을 때
객사에 묵으면서 연회도 가졌다. 조선시대에는 객사에 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예(망궐례)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하였다.

이 객사를 처음 지은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조선 순조 25년(1825)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다대초등학교 안에 있던 것을 1970년 현 위치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벽이 없이 기둥으로만 이루어진 이 객사는 일반적으로 중앙의 정당과 좌우 익실로 이루어진
 다른 객사들과는 달리 정당만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1980년 기둥과 마루를 보수하고 단청공사와 현판을 설치하였다.


옛부터 다대포는 왜구를 막기 위한 군사요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 부산진과 함께 다른 진보다 더욱 중요시되었다.


다대포 객사는 이 지역에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은 조선시대 객사건축물이다.

조선시대 다대포객사(多大浦客舍)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호 
부산 사하구  다대동 산144
1972.06.26 지정
관리자 부산광역시 사하구 문화공보과 051-220-4082
출처 문화재청(http://www.cha.go.kr)















'회원관(懷遠館)'

 



다대포진성의 모습으로 4대문이 있고 여장이 설치되어 있으며
동문과 서문의 경우는 옹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대문중 남문이 주 출입구이며 동문과 서문은 타 지역으로 가기위한 교통문으로 사용했으며
 북문의 경우는 많이 사용하지 않는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또한 다대포진의 가장 가운데 객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객사앞에는 누각이 있고 전선은 3척이 배치된 것을 알 수 있네요.
다대포진성의 경우 평지에 조성된 평지성이며 정사각형에 가까운 성곽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이 성은 둘레 1,806척, 높이 13척의 석성으로 동서남북에 성문이 있어
동문을 패인루(沛仁樓), 서문을 영상루(迎爽樓),
남문을 장관루(壯觀樓), 북문을 숙위루(肅威樓)라 했다.
성안에는 객사인 회원관이 있었는데 그 객사는 지금 몰운대에 옮겨져 있다.
구.다대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동헌(東軒)인 수호각, 군기소(軍器所)인 청상루, 금산소, 목소,
공방소, 도훈도소 등의 관아건물과 대동고, 유포고, 진창 등의 창고가 있었다고 합니다.

출처:펜저의 국방여행(http://panzercho.egloos.com)

대부분의 관청 건물이 그러하듯이 다대첨사영(僉使營)역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원래의 다대포진이었던 지금의 다대초등학교에서 다대포객사도 학교 건물로 전용사용되었으며, 1970년 현재의 자리에 이전,복원하였습니다.
 
다대초교가 개교 100주년(2004년)을 맞아 발간한 '다대백년사'에 의하면
다대초교의 전신인 다대포 사립실용학교가
1904년 개교 당시 다대포 객사 내에 있던 옛 공청 건물을 수리해 교사로 활용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과정에서 벽체가 없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80년 중수시에는 기둥과 마루를 보수하고
단청공사와 '회원관(懷遠館)'이란 현판을 설치하였습니다.



1929년02월02일에 찰영 한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원래 첨사영이 있었던 구 다대초등학교 내에 있던 모습으로서
“사립실용학교”로 사용당시 제19회 졸업생들이 졸업기념촬영 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사하사람들(http://cafe.daum.net/saha-club)



현재의 다대포객사 전면

현재 다대포 객사의 경우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서  
벽체가 없이 지붕과 기둥 및 밑뿌리의 하방(下防)만 남아 있어 객사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자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찾아오시는길
교통편

■ 버 스
   - 11, 2, 1000, 96,338 → 다대포역 하차
■ 지하철
   - 1호선 신평역(3번출구) 하차 → 2번버스 이용 또는 1호선 괴정역에서 하차 → 다대포해수욕장행 버스 환승(11번, 96번)
약도이미지


향교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입니다













풍영루(風詠樓)




1931년 풍영루(風詠樓)를 중건함



 양산향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205호
경남 양산시 교동

향교는 옜 성현을 받들면서,지역 사회의 인재를양성하고 미풍양속을
장려할 목적으로 설립된 전통시대의 지방 교육
기관이다.
양산향교는 1406년 (태종 6)에 창건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위치를 옮기고 중수를 거쳤다.
현재의 건물들은 19세기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향교의 공간은 교육과 재례 두 영역으로 나뉜다.
학문을 연마하는
명륜당과 일상생활은 하는 동,서재는교육기능을 담당하고,
 공자와 저명한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는 대성전 및 동,서무는
재례기능을담당하고 있다.
양산향교 역시 이러한
배치법을층실히 따르고 있다
그런데 양산향교는 가파른
뒷산을 배경으로 하여 교육영역은 평지에 조성하고.
재례 영역은
급한 경사지에 조성 하였다.
아울러 대성전은 19계단을 올라가야
되는 높은 곳에 지어
 마치 신전과 같은 위엄을 갖춤으로써

재례 영역으로서의 중심성을 강조하였다.

정면 출입구인 풍영루는 유생들의 여가 공간 및 여름철
학습간으로 이용되었다.
향교의 출입구에서 하늘을 난듯한
팔작지붕과 튼튼한 기둥을 받친 풍영루는
정문으로서의 위엄과
함께 향교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유림회관

안으로 들러 갈려고 하였으나 울타리가 쳐져 있어서 들갈수가 없었습니다




왼편으로 돌아가보니
관리 하시는 분의 집으로 보여 일단 들어가봅니다
오예~~ 들어 갈수 있는 문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풍월루를 안에서 바라본 모습


동재




명륜당(明倫堂)


서재


청원재(淸源齋) 


화장실

명륜당에서 바라본 풍영루


대성전으로 가는 내삼문이 문이 잠겨 있어서 담장 너머로 촬영을 하였습니다




대성전

다음지도로 보기-->http://dmaps.kr/xtx


 

양산향교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 1610년 무렵에 다시 지어졌고
이를 1626년 중건하여 1700년에는 읍의 서쪽으로 옮겼다가
1744년에 읍의 동쪽 옛터 부근으로 다시 옮겨진 후,
1828년(순조28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건(移建)되었다.

1931년 풍영루(風詠樓)를 중건하였고,
1936년에는 청원재(淸源齋)를 중건하였으며,
1955년에는 명륜당(明倫堂)을 중수하였다.

1970∼1971년에 걸쳐 대성전과 명륜당을 비롯하여
풍영루 등의 부속건물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였고,
1986년에 대성전과 명륜당 등을 중건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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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읍성임진왜란역사관(2011년3월예정)

도시철도 4호선 개통 함께 개관…동래읍성 일대 발굴 유물 전시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위)과 아래 왼쪽부터 대합실 전체 투시도, 전시실 전면 입출구, 역사관 내부 조감도.
출처 부산부비뉴스-->http://news.busan.go.kr


 주변관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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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동헌 외삼문

* 동래부동헌은 동래부사가 지역을 다스리고,
세금을 거두며, 죄를 지은 사람에게
   벌을 주는 나라의 일을 처리하던 관청입니다.
자세히 보러가기-->동래부동헌(東萊府東軒) 동래읍성지 부산시 지정 유형문화재 1호



"송공단(宋公壇)" 동래읍성지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1호
◈ 지정일 : 1972년 6월 26일
◈ 소재지 : 부산시 동 래구 복천동 229-78번지 일원

자세히 보러가기-->"송공단(宋公壇)" 동래읍성지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1호


부산 동래향교 정문인 '반화루(攀化樓)'

강학공간의 정문인
반화루(攀化樓)는
후한서에 용과 봉황을 성철(聖哲)과 임금을 비유한 반룡부봉(攀龍附鳳)에서
 따온 것으로 즉, 성인을 따라 덕을 이루고 임금을 받들어 공을 세우기를 원하는 뜻이다.

자세히 보러가기-->"동래향교(東萊鄕校) " 동래읍성 시도유형문화재 제6호 (동래구)

자세히 보러가기-->부산시 동래중심에 자리한 역사관광지 "동래읍성" 명륜공원의 "서장대"


앞면 7칸·옆면 1칸 규모로, ㄱ자 모양의 집이다.
자세히 보러가기-->
"장관청(將官廳) " 동래읍성지 부산광역시 시도유형문화재 제8호 (동래구)

동래읍성 역사관입니다
이곳은 옜 동래읍성의 모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주변관광지


 자세히 보러가기-->"박차정(朴次貞) 의사 생가" 방문 동래읍성지 1차순례코스 마지막지점







 주변관광지

송상현공의 결의와 호국정신을 잘 나타낸 명언비
-전사이가도난-(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자세히 보러가기-->충렬사 전사이가도난"戰死易 假道難"


담장너머로 보이는 군관청 건물
- 군관청 (軍官廳) : 1975년(숙종 원년) 동래부사 어진익이 중건한 군관의 집무소로 사용되던 관아 건물로 1983년 2월 경내로 이전 복원 하였다.(시유형문화재 제21)
자세히 보러가기-->부산시 동래읍성지 군관청


현재의 충렬사가 있는 망월산 정상에 있는 전망대로서 1980년 복원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1층 기와집으로 동래읍성의 동쪽을 관찰하던 전망대로 추정.
 북쪽 기둥 사이에 ‘망월대(望月臺)’라 쓴 큰 현판을 걸어두었다

자세히 보러가기-->부산시 동래중심에 자리한 역사관광지 ´동래읍성´ 망월산의 "동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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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타이어로 달리는 부산지하철 4호선을 아십니까?

2011년 3울에 개통이 된다고 합니다
이 4호선이 개통되기를 기다리는 분들이 현재 목이 빠지게 기디리고 있습니다^^

동래부동헌의 지형적인 위치를 보면 그 규모가 클수 밖에 없는 이유가 보인다
임진왜란대 왜구가 부산진성과 다대성을 함락하고 동래읍성을 침락한것은
고지도를 보면 이해가 빠르다

이 고지도의 원본출처-->클릭
이 동래성안에 동래부동헌이 있다

동래도시철도역에서 출발하여 동래부 동헌에 도달합니다

 

 동래부동헌(東萊府東軒)

이 건물은 조선시대에 동래부사가 공적인 업무를 보던 곳이다.

동헌은 일명 아헌(衙軒)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에 수령이 직접 공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따라서 동헌은 관아 건물 가운데서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동래부는 정3품 당상관인 부사가 재임하였는데, 관방으로서 대일 외교시 중시되었다. 때문에 관아의 규모도 다른 고을에 비하여 규모가 크고 격식도 높았다.

1636년(인조 14) 동래부사 정양필이 창건하였고, 1711년(숙종 36) 동래부사 이정신이 충신당(忠信堂)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이후 조선말기까지 동래부와 동래관찰사의 아헌으로 사용되었다. 일제시대에는 동래군청 청사로, 1973년 동래군이 양산군으로 편입됨에 따라 양산군보건소 동부지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상세벙보 문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문화공보과 051-550-4085
출처 문화재청--:클릭



동래부동헌 외삼문

* 동래부동헌은 동래부사가 지역을 다스리고,
세금을 거두며, 죄를 지은 사람에게
   벌을 주는 나라의 일을 처리하던 관청입니다.






입구의 왼편에 보면 관광안내지도가 들어있는  함을 볼수가 있다
이 안에는 두가지의 인쇄물이 있는데
하나는 8절지의 양면 안내판이고
다른 하나는 대형지도안내물이다




 외삼문에서 바라본 충신당


외삼문의 여닫이문 축 의 모습


충신당(좌)과 동익당(우)의 모습




한쪽에 모여 있는 선정비들







동래부동헌의 옛모습을 1/120 로 축소하여 만든 모형


충신당 내부의 모습


충신당에서 바라본 외삼문의 모습


외삼문을 다시 나서면 왼편에 공중화장실이 있습니다


네이버파노라마 지도로 바로보기-->클릭


다음 로드뷰로 바로보기-->클릭

사진을 클릭하면 큰 사진으로 볼수 있습니다


교통안내 출처-->클릭


 동래부동헌
1636년 정양필이 창건한 건물로 부산에 남아있는 조선시대 단일건물중 규모가 가장크다.
 
부산의 진산으로 길지임을 알았던 일제에 의해 동헌주변에 강제로 가축시장을 형성하여민족의 얼을 말살하려고 시작된 동래시장이 현재는 재래시장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동헌이 왜 시장가운데 위치하고 있나하는 의구심은 풀렸으나
일본의 간교함을 재차 새기는 걸음이었다.
이 글의 원본출처-->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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