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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교회]부산에서 아주 오래된 교회

워크뷰 2011. 4. 6. 07:52
 부산진교회의 시작

미 북장로교 선교부에서는 1890년 부산을 중요 선교지로 지목하여
 배위량(W. Baird) 선교사를 부산으로 파송한다. 배위량은 미국 공사 헤어드(A. Heard)의
조력으로 부산진에 약 80평의 대지의 한옥을 확보,
동년 11월 그는 부인과 함께 당시 공관에서 일하던 미국인 가족들과 자기 집에서 일하던 한국인 몇 사람과 예배드리게 되었던 것이 부산교회(후에 부산진교회로 개칭)의 시작이다.

 
 
베어드는 평양의 숭실대학을 시작하고 발전시킨 교육 선교사였습니다.

베어드는 해외선교의 열정이 대단하였던 시카고의 매코믹신학교 출신입니다.
학업에 대한 그의 열정은 남달라서,
선교사로 활동하면서도 철학과 신학 박사 과정을 마칠 정도였습니다.

1891년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온 베어드 부부는 몇 년 동안 부산과 대구를 중심으로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1897년에 평양으로 선교지를 옮긴 후에는 자신의 사랑방에서 13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학당을 열었습니다. 3년 후 이 학당은 숭실중학으로 성장하였고,
1906년에는 합성숭실대학(Union Christian College)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다섯 남매와 남편의 현모양처이던 베어드 부인은 한글로 물리학, 동식물학 교과서를 번역하고 많은 글들을 남겼는데, 안타깝게도 암으로 1916년에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2년 후에 재혼한 베어드는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을 위해서도 힘썼습니다.

1931년 숭실전문학교와 중학교 교장이던 맥큔의 초청으로 숭실 개교일에 참석한 베어드는 한 달 후 장티푸스에 걸려 소천 하였습니다.

출처-->하늘나라 십자가나라


부산진교회 신관입구에는 왕길지기념관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왕길지목사 그는 누구인가?

▲ 1916년 제5차 장로교 총회는 왕길지선교사가 신학생들에게 헬라어와 영어를 가르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사진은 왕길지선교사와 헬라어 수업을 듣는 학생들.

왕길지 선교사는 초기 경상남도의 교회설립과 교육, 평양신학교의 교육에 주춧돌을 놓은 거목이었고, 차세대 호주선교사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자기 이름을 '왕길지(王吉志)'로 정한 것은 '엥겔'과 '왕길'이 발음이 비슷했고, '최고로 좋은 뜻', 즉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 후 왕길지목사는 18년 동안 부산에서 목회, 교육, 순회전도자로 헌신했다.
1938년 왕길지목사는 70세가 되어 38년의 선교사 생활과 31년의 교수생활에서 은퇴했고 아그네스는 43년간의 선교사 생활을 끝내고 멜번으로 돌아갔다. 그는 이듬해 1938년 5월 24일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부인은 1954년 8월 16일 8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출처-->정병준목사 호남신대 겸임교수


포도나무 정원 카페를 나오면 벽면에 부신진교회의 역사가 액자에 붙어 있습니다






벽면의 액자역사를 통하여 이 부산진 교회가 걸어온 길을 알수가 있습니다


3층 계단에서 4층계단으로 올라가는길에 보이는 십자가 유리창


4층에는 1층에서 바로 올라올수 있도록 엘리베이터도 설치되어 있습니다


부산진교회. 부산 뿐만 아니라 한국 전체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긴 전통을 가진 교회

 부산진교회 구관입구에서 바라본 부산진교회 신관(왕길지기념관)

사진 / 1952년 준공 석조 교회당
(설계,시공 : 건축가 김칠봉 장로)




 데이비스 목사는 호주 빅토리아 장로회에서 우리나라에 파송된 최초의 선교사로써
1890년 4월 5일 부산에서 순교하였다
구리나라 복음화에 몸바친 공을 기리어 먼저 세웠던 기념비를 교회설립 110주년을 맞아
복원하여 이곳에 세우다
2001년 1월 14일
부산진교회

 데이비스 목사그는 누구인가?

호주에서 한국에 보낸 최초의 선교사 데이비스 선교사 남매

▷▶ 은둔의 땅,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았던 <조선> 땅에 복음의 빛이 120여 년 전에 들어왔다. 호주에 대한 나라 연구를 하던 중 오래 전 호주에서 파송된 선교사, 그러나 복음을 전하기도 전에 부산에서 순교한 한 호주 선교사에 대해 읽게 되었다.

조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

미혼의 젊음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천연두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난 뒤 묘지도 없어진 조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는 한국에 온 첫번째 호주인 선교사이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1889년 8월 28일 증기선 1호 ‘치난’호를 타고 누이 메리 데이비스 선교사와 함께 시드니를 떠나 40일간 걸친 길고도 지루한 항해 끝에 10월 2일 아침 부산항에 입항하였다.

그에 앞서 먼저 한국에서 사역하던 미국 선교사들의 배려로 서울에서 수 개월간의 적응기간을 보냈고, 마침내 그는 충청, 전라도를 거쳐 부산으로 향한 것이다. 한국어 선생과 조사 한 사람만을 대동한 여행이었는데, 원래 몸이 약했던 데이비스에게는 무리가 되는 여행길이었다. 낯선 풍토, 언어의 장벽, 서양인에 대한 민심의 적대감 등 초창기 선교개척 여행의 험준한 장애물을 넘지 못하고 데이비스는 부산 인근에서 쓰러졌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급히 오라”는 전갈이 당시 부산에 잠시 머물며 역시 선교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던 캐나다인 독립선교사로 훗날 미북장로교에서 활동한 게일에게 전해졌다. 한걸음에 데이비스가 누워있는 움막으로 달려간 게일에게 데이비스는 창백한 손을 뻗었다. 부산의 게일 거처로 급히 옮겨 치료를 받았으나 데이비스는 천연두와 급성폐렴이 겹쳐 1890년 4월 5일 오후 1시 경, 33세의 젊은 나이로 한국 땅을 밟은 지 183일 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데이비스의 죽음으로 호주의 한국선교 개척은 중단의 위기를 맞았고 함께 내한했던 누이 메리도 동생을 잃은 슬픔과 좌절을 견디지 못하고 본국으로 귀국하고 말았다. 이로써 호주교회의 한국선교 시도는 실패한 것으로 보였다. 그렇지만 데이비스의 죽음은 새순이 되어 푸르게 다시 피어났다. 그가 한국에서 본격적인 선교의 꿈을 펼치지도 못하고 목숨을 바쳤다는 소식은 호주교회에 널리 퍼졌고, 수많은 선교사 지망자와 지원교회를 낳았다.

1891년 이후 호주장로회 선교사들이 대거 한국 땅으로 들어왔고, 부산과 경남지방을 선교 구역으로 삼아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이들은 선교사로서의 꿈을 펼치지도 못하고 이국 하늘 밑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죽어간 데이비스의 희생을 귀감으로 삼아 초창기 한국선교의 고통을 감내해 나간 것이다.
데이비스의 죽음은 죽음에 머물지 않고 그 계승자들에 의해 그리고 한국 땅에서 복음의 결실로써 부활하였다. 그 후미진 비탈에 외로이 누워있는 선교사들. 그들은 왜 한국 땅에 묻혔는가? 그들은 우리 한국과 한국민족을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한국 땅에 뼈를 묻은 것이다. 1세기 전의 한국이 어떠했는지 상상만 해도 답답한 한국 땅에 그들은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자처해 순교했던 것이다.

*출처:`크리스찬 리뷰` 2005.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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